[칼럼] 바람

2022.02.03 10:30:00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추풍령 바람과 함께 시오리(6㎞) 들판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아침 등교는 추풍령 바람을 등에 지고, 저녁 하교는 추풍령 바람을 가슴으로 안고 다녔다. 겨울이면 추풍령 내리닫는 북서풍 바람에 등을 떠밀리며 허둥허둥 학교에 갔다. 행보 전체가 불안정하고 공연히 마음만 다급했다. 꼭꼭 눌러 쓴 교모도 사정없이 날아갔다.

 

하교하는 길은 바람이 숨을 막았다. 체급 낮은 내가 거구의 추풍령 바람과 밀어내기 한판을 겨루며 간다. 아주 육중하고 뻑뻑한 철문을 온몸으로 밀어제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찍듯이 나아가야 한다. 자전거도 무용지물, 내려서 붙잡고 걸어갔었다. 심한 눈보라 속을 가는 자세로, 상반신을 30도 정도 웅크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걸었다. 더구나 이 길은 약간의 경사까지 있어서 집으로의 귀환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렇게 추풍령 바람이 있어 내 다리에는 근육이 다져졌으리라. 뒷날 인생 풍파를 헤쳐나가는 정신의 근육 또한 다져주었으리라. 바람의 은혜라 해야 할 것이다. 바람의 기억은 인생 굽이굽이마다 있었다.

 

젊은 시절, 설악산에서 길을 놓쳤다. 대청에 오른 다음에 하산 길로 인적 드문 화채봉 코스를 모험적으로 택했는데 한참 내려오다 길을 잃은 것을 알았다. 다시 대청으로 올랐으니 하루 두 번 등정이다. 늦게야 다시 화채봉 능선으로 내려오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멀고 또 어둡다. 나는 심한 탈수 현상으로 어느 벼랑바위에 드러눕고, 일행은 허기와 탈진과 한기 속에 불안한 밤을 새운다. 이를테면 조난이다.

 

동이 틀 무렵에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고 밝은 태양 아래 길을 찾아 간신히 권금성 내려다보이는 화채봉 끝자락 능선 위에 오르니, 놀랍고 무서운 기운이 덤벼든다. 바람이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바람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나를 휘몰아 감아서 뽑아 올릴 것 같은 바람이다. 서 있기도 힘들거니와 걸을 엄두를 내기는 더욱 어렵다. 몸을 낮추고 스크럼을 짰다. 그러나 반가웠다. 나는 이 바람에서 느낀다. 마침내 살아났다는 환희의 역동을 느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팔레르모에서 느끼던 여름 모래 열풍, 아프리카 북단 사하라 사막에서 지중해를 건너와 불바람처럼 뜨겁고 따갑게 달라붙던 이 바람은 바람이라기보다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2002년 태풍 루사는 ‘재앙의 발톱’으로 둔갑한 바람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을 할퀴고, 사람들의 소망까지도 할퀴었다. 불현듯 내 죄를 돌아보게 한다.

 

아, 기억에 남기로는 이런 바람도 있었다. 연모의 정을 차마 어쩌지 못하고 가슴 졸이며 전했건만, 너무도 정중하고 고상하게 거절하며 바람맞히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 맞은 그 바람은 내게 어떤 힘이 되어 나를 키워냈을까. 좋기로는 우리 동네 몽촌토성 언덕마루를 무상무념으로 걷는 내 걸음 위로 부는 봄바람이 좋다. 화평 가득함(peaceful)이 있으므로 그러하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 바람에 산통 다 깨졌다.’, ‘눈이 오는 바람에 지각했다.’ 이들 문장에 나오는 ‘바람’은 ‘부는 바람(wind)’과 같은 바람인가. 전문가들의 언어학적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같은 말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 바람에 산통 다 깨졌다.’ 이렇게 말할 때 ‘바람’은 ‘부는 바람(wind)’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 바람에’서 ‘그’에 해당하는 것을 아무것이나 넣어 보자. ‘아기가 우는’으로 넣어 보면, ‘아기가 우는 것’이 곧 ‘바람(wind)’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아기가 우는 것’이 바람(wind)이 되어 불어와서 산통 다 깨졌다는 것이다.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넣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바람(wind)이 되어 불어와서 산통 다 깨졌다는 것이다.

 

바람은 무언가를 일어나게 한다. 바람은 불과 만나서 대화재를 만들고, 바람은 물과 만나서 거친 파도를 만든다. 바람은 원인과 영향을 제공하는 관여자이다. 지각하게 하는 원인(또는 영향)으로 ‘눈이 오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긴 거나 같다. 그래서 ‘눈이 온 것’이 바람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서 ‘눈이 오는 바람에’ 하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바람은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와서 마음의 풍파를 일으키고 어떤 일탈을 조장한다. 이런 경우는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는 바람이 대부분이다. 바람났네! 바람이 들었다! 바람이 나면 하던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바람이 들어서 마음은 이미 딴 데에 가 있다 등등이 모두 바람의 심리적 작용을 보여 주는 말이다. 좋은 일에 바람이 났다는 말의 쓰임은 거의 없다.

 

선거가 다가오니 ‘선거는 바람이다’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 이 또한 바람이 어떤 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는 심리를 유권자 대중에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진영의 선거 전략가들은 바람을 만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저절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바람도 있다. 그걸 민의라고 한다. 그러나 선거 공학적 바람은 민주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시민 개개 주체의 바른 각성과 판단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온당치 않다.

 

바람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내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주셨던, 민간에 전승되어 온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음력 2월은 바람을 관장하는 ‘영동할미’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대지에 씨를 뿌리려고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 봄에는 어디나 바람이 세게 불고 또 많이 분다. 영동할미는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람이 불면 딸을 데리고 내려온다. 비가 올 때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오는 것은, 며느리 고운 옷이 비에 젖어서 볼품없게 되는 걸 바라기에 그렇고, 바람이 불 때 딸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은, 딸의 고운 옷이 바람에 휘날려 딸의 자태가 한층 더 고와 보이기를 바라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옛말에 시어머니 심술은 하루 세 번 하늘에서 내린다고 했다. 영동할미도 그런 심술이 대단했나 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 않다. 며느리는 사랑하는 아들의 부인이요, 집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혹시라도 그 고운 자태가 남의 눈에 더 예쁘게 보여서 손이라도 타면 큰일이다. 비에 좀 젖어서 볼품없게 보여야 한다. 딸은 더 예쁘게 보여서 좋은 혼처 고르고 골라서 보여야 하므로 바람이 부는 날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다. - 이숙영,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117쪽

 

어머니는 전해 오는 영동할미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시면서 당신이 바라는 뜻을 새로이 불러일으키셨다. 이 또한 마음속 바람의 작용이라 보고 싶다. 어머니는 안에 있는 어떤 새 ‘바람’을 끄집어 내놓으신 것이다. 이때의 ‘바람’은 부는 바람(wind)이면서 동시에 바라고 기대하는 바람(expect 또는 want) 양쪽 모두가 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바람’은 ‘바라다’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자유로운 상상의 추론을 해 본다. 물론 말의 형태(morphology)나 의미(semantics)를 논구하여 언어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은 아니다. 그저 나 개인의 상상이다.

바람이 불어서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보아 온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심리 세계의 현상으로도 가져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도 이미 ‘바람’이 들어와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래서 ‘부는 바람’의 바람과 ‘이루어지기를 바람’의 바람은 같은 족보에 속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이렇게 ‘바람(wind)’은 ‘바라다(expect)’를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샤머니즘의 주술(기원)에 바람이 관여해 있는 현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학교는 곧 새 학년도를 맞는다. 새 교실에 새 아이들이 찾아올 것이다. 선생님들은 생각할 것이다. 나는 새 아이들에게 어떤 바람(wind/expect)으로 불어서 다가갈 것인가.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내게 어떤 바람(wind/expect)으로 불어서 다가올까. 동남풍을 부려 적벽대전에서 큰 승리를 했다는 제갈공명의 바람 다루는 기술은 그에게만 있는 것인가. 학자들은 그것이 단순한 주술로 불러들인 신비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지형과 기상을 잘 관찰한 지혜의 소산이라는데 나도 바람을 만들어 볼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새 아이들에게 내 바람을 어떻게 불어서 보낼 것인가. 헬라어에서는 ‘바람’과 ‘영혼’이 동의어라는데… .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한국독서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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