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찬가로 가장 잘 알려진 성경(Bible)의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에는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세상에 대해 이처럼 자상한 정의는 없다.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 하면서 그 방법으로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다며 위와 같이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그는 인간이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재산을 나눠 주고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무엇을 기다릴 때, 자주 함께 등장시키는 말이 있다. 바로 ‘내일’이다. 예수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이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구약 성경의 예를 들었다. 사렙타의 과부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창조주께서 은총을 베푸셨음을 상기시켰다. 이천 년 전 선포된 은총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 오늘도 우리에겐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며 내일을 향하는 오늘을 더없이 귀중한 선물(Present)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내일은 없는 듯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물질주의에 종속되고 자기중심의 사고로 이익을 구하며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 관한 관심과 배려, 나눔은 점차 빛을 상실하고 있다. 상호 간에 사랑이 사라지니 혐오 감정만이 살아서 이분법적 사고로 내 편 네 편을 가른 채 극단적인 행동을 마다 않는다. 하루도 남에 대한 칭찬과 격려, 응원의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직 파괴적인 언어로 상대를 비난하고 헐뜯고 고발하여 법의 판단에만 의지한 채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과연 이천 년 전에 인간을 구원한 예수의 사랑이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특히 대선을 앞둔 요즘 우리의 상황을 보라. 과연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것은 그래도 인간에 대한 사랑뿐이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의 법칙은 그 어떤 이론과 원리를 능가하는 최고의 진리라 믿는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것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이천오백 년 전의 공자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주장하며 ‘인(仁)한 사람’만이 그가 보여주는 덕(德)으로 세상을 통치할 군주요, 충성스런 신하요, 가족을 이끄는 부모요, 자녀다운 사람이라 강조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야 각자의 본분에 따른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면 ‘인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가르친 제자들은 사랑을 알고 배워 그 사랑을 타인에게 베풀며 살아갈 수 있다. 이는 흔한 세속의 언어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는 말과 상통한다. 오늘날 학교에서 교권과 학생 인권이 충돌하는 것도 바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힘은 바로 사랑이라 하지 않았던가. 모두가 아프고 상처받기 쉬운 시대다.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며 실천하는 것이 최고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