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 쥐바라숭꽃은 어떤 꽃?

2022.10.05 10:00:00

 

윤흥길의 단편 <기억 속의 들꽃>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쥐바라숭꽃’이라는 꽃 이름이 나온다.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다. 먼저 그 대목을 보자.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내리다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었다.
“쥐바라숭꽃….”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거라면 명선이는 내가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쥐바라숭이란 이 세상엔 없는 꽃 이름이었다. 엉겁결에 어떻게 그런 이름을 지어낼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어리벙벙할 지경이었다.
“쥐바라숭꽃…, 이름처럼 정말 이쁜 꽃이구나. 참 앙증맞게두 생겼다.”

 

이 소설은 6·25 때 만경강 부근 피난민들이 지나는 마을이 배경이다. ‘나’는 피난민들이 떠나고 남겨진 고아 명선이를 우연히 집으로 데려온다. 어머니는 명선이를 박대하다가 명선이가 금반지를 내밀자 반색하면서 우리 집에서 살게 한다.
명선이는 영악하면서도 웬만한 텃세나 구박에 굴하지 않는 당돌한 아이다. 특히 부서진 다리 철근 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벌이는 것이 특기다. 그러나 비행기 폭격 후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자기 위에서 죽어 있어서 밀어낸 아픈 기억이 있는 아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다가 다리라도 올리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고, ‘다른 것은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면서도 유독 비행기만은 병적으로 겁을 내는’ 아이였다.


명선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구박하기 시작하자 또 금반지를 내놓는다. ‘나’의 부모는 명선이가 금반지를 더 갖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어디에 숨겼는지를 추궁하자 명선이는 집을 나가버린다. 이게 소문나면서 명선이는 금반지를 찾으려는 동네 사람들에게 발가벗겨지는 수모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명선이가 ‘머스매’가 아니라 ‘지집애’라는 것과 서울 부잣집의 무남독녀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은 이런 일이 일어난 다음 ‘나’와 명선이가 부서진 다리의 철근 위에서 놀다가 꽃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다음 대목은 이렇다.

 


 

또 한바탕 위험한 곡예 끝에 기어코 그 쥐바라숭꽃을 꺾어 올려 손에 들고는 냄새를 맡아보다가 손바닥 사이에 넣어 대궁을 비벼서 양산처럼 팽글팽글 돌리다가 끝내는 머리에 꽂는 것이었다. 다시 이쪽으로 건너오려는데 이때 바람이 휙 불어 명선의 치맛자락이 훌렁 들리면서 머리에서 꽃이 떨어졌다. 나는 해바라기 모양의 그 작고 노란 쥐바라숭꽃 한 송이가 바람에 날려 싯누런 흙탕물이 도도히 흐르는 강심을 향해 바람개비처럼 맴돌며 떨어져 내리는 모양을 아찔한 현기증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쌓인 먼지에 뿌리내리는 쥐바라숭꽃은 전쟁 중에 홀로 강인하게 살아가는 명선이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런데 명선이 머리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은 명선이가 곧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다시 다리 철근 위에서 놀던 어느 날, 명선이는 비행기 폭음에 놀라 한 송이 들꽃처럼 떨어져 죽는다. 명선이가 죽은 후 ‘나’는 다리 끝에 매달려있는 명선이의 헝겊주머니에서 금반지를 발견한다. 그러나 주머니째 강물에 떨어뜨리고 마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기억 속의 들꽃>은 이처럼 한 소녀의 죽음을 통해쟁의 비극을 보여주고, 전쟁이 야기하는 어른들의 비인간성도 고발하는 소설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명선이, 나, 어머니, 아버지, 누나, 숙부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변화가 장편처럼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쥐바라숭꽃은 개망초였을까?
그럼 쥐바라숭꽃은 실제로는 어떤 꽃일까. 아니면 어떤 꽃에 가까울까. 인터넷상에는 이 꽃이 어떤 꽃인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다. 쥐바라숭꽃은 ①교각 위 먼지 속에 뿌리를 내렸고 ②난생처음 보는 듯하고 ③해바라기 모양의 노란색이고 ④동전만 한 크기이고 ⑤대궁을 비벼서 돌릴 수 있는 들꽃이라고 했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꽃이 있을까.


먼저 떠오르는 꽃은 민들레다. 해바라기처럼 노란색이라는 점, 흙이 조금만 있어도 자랄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점, 무엇보다 비빌 수 있는 대궁이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민들레는 해바라기와 달리 갈색의 꽃 중심부(대롱꽃 다발)가 없다는 점에서 모양이 다르고, 꽃의 크기도 동전보다는 크다. 또 민들레는 흔하디흔한 꽃이어서 ‘난생처음 보는 듯한’ 꽃도 아닐 것이다. 요즘엔 토종민들레 대신 귀화한 서양민들레가 더 흔해졌다.

다음은 개망초다. 1984년 KBS에서 이 소설을 TV문학관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개망초로 쥐바라숭꽃을 표현했다고 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꽃의 크기는 동전만 하다는 점에서 그럴듯해 보인다. 개망초는 공터 등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풀이고, 꽃의 모양을 갖춘, 그런대로 예쁜 꽃이다. 하얀 꽃 속에 은은한 향기도 신선하다. 그러나 개망초는 결정적으로 꽃잎으로 보이는 혀꽃이 흰색이라는 점에서 쥐바라숭꽃일 수 없다. 더구나 너무 흔한 꽃이어서 난생처음 보는 듯한 꽃일 수도 없다.

 

노란 꽃이 피는 씀바귀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교각 위 먼지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고, 동전만 한 크기이고, 대궁을 비벼서 돌릴 수 있는 들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전체적인 인상이 해바라기 축소판과는 거리가 있다. 줄기와 잎을 뜯으면 흰즙(유액)이 나오는 것이 씀바귀의 특징이다.


해바라기처럼 생겼다는 점에 방점을 두고 루드베키아(Rudbeckia)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루드베키아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꽃이다. 꽃 직경이 10∼12㎝이고 혀꽃은 노란색, 중앙부는 검은색 계통이라 해바라기와 비슷한 모양이다. 우리말로는 원추천인국이라고 부른다. 루드베키아가 해바라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맞지만, 꽃이 동전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서 쥐바라숭꽃일 수 없다. 또 키가 50㎝ 정도로 자라서 교각 먼지에서 자라기도 어려울 것이다. 확인해 보니, 만경강 근처에만 자라는 해바라기 닮은 특별한 꽃은 없었다. 결국 쥐바라숭꽃은 실재하지 않고, 작가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꽃인 셈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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