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엄마가 아기에게 딸기잼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여 매일 딸기잼을 먹였다. 그런데 아기는 딸기잼을 무척 싫어했다. 그날도 엄마는 아기에게 딸기잼을 먹이려고 거의 강제로 입을 벌려서 딸기잼을 먹였다. 아이는 먹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그만 딸기잼 그릇이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바로 그때 일어났다. 8개월짜리 아기는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방바닥에 쏟아진 딸기잼을 손으로 움켜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먹기 싫어하던 딸기잼을 스스로 먹다니….
이 일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가 싫어했던 것은 딸기잼이 아니라, 딸기잼을 먹이는 방법이 싫었던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배우도록 프로그램화된 존재다." 노벨상 수상자인 병리학자이자 유전학자인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 1920~2013)의 말이다. 위의 일화를 교육적으로 접근해 보자.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배움을 즐길 줄 아는 존재들이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싫은 것이다. 이게 맞다면 교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 방법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는 선생님 앞에서 아이들은 교사를 거부한다. 배움으로부터 도주(escape from learning)하는 아이가 된다. 20세기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먹이는 교육은 마치 '소화제'나 '영양제'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소화제나 영양제는 필요한 사람에게만 유용하다. 곧,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위장 기능이 좋은 사람에게 소화제는 오히려 나쁘다. 영양 상태가 좋은 사람에게 영양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교사의 가르침이 바로 그렇다. 모든 아이들에게 교사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잘 가르칠 필요는 없다. 교사가 가르쳐서 아는 학생은, 교사가 가르치지 않아도 안다.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잘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교사는 학습의 촉진자(facilitator), 안내자(guide), 도우미(helper)라고 한다. 교사의 이런 역할에 의해 학생은 사고력과 창의적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 학생의 머리는 지식의 창고이면서 동시에 단련해야 할 근육이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들과 격의 없는 소통과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수업, 아이들과 깊이 소통하며 그들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드러나도록 수업을 설계해야 한다. 학생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조용히 만들어 놓고, 교사가 혼자서 친절하게 설명만 하는 수업은 이미 구닥다리 방식이다. 시대는 21세기인데 아직도 19~20세기의 방식을 집착한다면 이는 부작용과 저효율성이 뻔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내용을 쉽게, 딱딱한 내용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이 교사의 수업이 아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하고, 그러는 가운데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는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공부다. 따라서 교사가 어떻게 수업 설계를 해야 할지 명백하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사실적 지식, 개념적 핵심 지식을 기반으로 하되 생각하는 힘을 길러 삶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목적 아래서 학생 중심의 수업, 학생 참여형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오개념과 난개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이로써 서서히 수업 설계, 수업 실행, 수업 평가, 그리고 수행평가에 적합한 교수법을 축적하게 되어 열심히 가르치고 또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 있다. 결국 이는 학생들에게 배움을 유발하는 동기부여하고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교사도 과거로부터 익숙하지만 학생들이 꺼리는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디지털 대문명 시대에 적합한 다양한 가르침의 방식을 창조(創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