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힐 듯 토종 라일락 향기

2023.05.08 10:30:00

 

박완서 장편소설 <미망>에서 수수꽃다리를 발견했을 때 실제 꽃을 본 듯 반가운 마음이었다. 이 소설 배경이 황해도와 가까운 개성이라 자생지 수수꽃다리가 아닌가 싶어서 더욱 관심이 갔다. 수수꽃다리는 국내 자생지가 황해도·평안남도·함경남도의 석회암 지대다.


4월 파일이 며칠 안 남은 용수산은 한때 온 산을 새빨갛게 물들였던 진달래가 지고 바야흐로 잎이 피어날 시기였다. 그러나 수수꽃다리는 꽃이 한창이어서 그 향기가 숨이 막히게 짙었다.

 

<미망>은 19세기 중반부터 6·25 즈음까지 개성의 한 거상(巨商) 일가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위 대목은 주인공 태임이 할아버지 전처만과 함께 개성 용수산을 넘을 때 나오는 장면이다. 초파일을 앞두고 있다면 봄이 무르익은 5월 중순이다.

 

라일락이면 어떻고, 수수꽃다리면 어떠하리, 꽃과 향기를 즐기면 그만 
라일락이 만개하는 계절이다. 라일락이 피면 진한 향기 때문에 근처만 가도 알 수 있다. 라일락만큼 향기가 진한 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향기’하면 떠오르는 꽃이 라일락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 <그 남자네 집>에도 사랑마당에 핀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이 나온다.

 

그런데 <미망>에 나오는 꽃은 라일락이 아니라 수수꽃다리다. 4월 말~5월 초 서울 홍릉수목원에서도 수수꽃다리라는 팻말을 단 나무가 꽃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수꽃다리는 라일락과 비슷하지만, 잎과 꽃 모양이 약간 다르다고 한다. 도감엔 라일락은 잎이 폭에 비해 긴 편인데, 수수꽃다리는 길이와 폭이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설명을 보고 현장에서 라일락인지 수수꽃다리인지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수수꽃다리인지 아니면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수입 꽃나무로 들여와 온 나라에 퍼진 라일락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전문가도 어렵다”고 했다. 여기에다 라일락의 우리말이 수수꽃다리라고 생각해 라일락에다 수수꽃다리 팻말을 달아놓은 경우도 많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생지에서 수수꽃다리 특징을 정확히 파악해 라일락과 비교하면 그나마 구분 포인트를 찾을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설명 자체가 부실하다고 했다. 몇몇 수목원 등에서 볼 수 있는 수수꽃다리는 분단 이전에 옮겨 심은 것들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맞는지 미심쩍은 면도 없지 않다. 수수꽃다리 자생지에 자유롭게 다닐 날이 곧 오기를 바랄 뿐이다. 어떻든 전문가들도 애를 먹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라일락과 수수꽃다리 구분에 신경 쓸 필요 없이 그 꽃과 향기를 즐기면 그만일 것 같다.


수수꽃다리라는 예쁜 이름은 잡곡의 하나인 수수에서 온 것이다. 박상진 교수는 책 <궁궐의 우리나무>에서 ‘꽃차례에 달리는 꽃 모양이 수수꽃을 많이 닮아 ‘수수꽃 달리는 나무’라 하다가 수수꽃다리라는 멋스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수수꽃다리와 형제나무들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정향(丁香)나무’라고 불렀다. 박완서는 산문집 <두부>에서 1996년 베이징에 있는 루쉰 고택을 보러 갔는데 ‘그 집 마당에 정향목(丁香木)이란 팻말을 달고 서 있는 나무’가 있었다고 했다. 정리하면, 토종의 수수꽃다리는 북한에 자생하고, 라일락은 서양수수꽃다리이고, 정향나무는 라일락 종류의 중국식 이름이다. 현인의 번안곡 ‘베사메무쵸’에 나오는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중 리라꽃은 라일락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다른 토종 수수꽃다리 종류는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수수꽃다리와 비슷한 토종 형제나무로 꽃이 흰색이고 수술이 밖으로 나온 개회나무, 잎 뒷면 주맥에 털이 많은 털개회나무(정향나무), 묵은 가지가 아닌 새 가지에서 꽃대가 나오는 꽃개회나무 등이 있다.


아담한 크기의 라일락, 미스김라일락
 

몇 년 전 늦봄에 강원도 인제 곰배령에 올랐다. 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서 5km쯤 걸어가면 곰배령 정상이다. 곰배령에서 하산하는 길 언덕에 가면 꽃개회나무가 있다고 했다. 마침 꽃이 필 무렵이었다. 꽃개회나무는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 능선이나 정상 근처에서 자라 쉽게 보기 어렵다.


드디어 꽃개회나무를 처음 ‘알현’했을 때 듣던 대로 묵은 가지에서 꽃이 피는 다른 종류와 달리, 새 가지에서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수꽃다리 형제답게 향기도 강렬했다. 3시간여 땀 흘리며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덕유산에 가면 털개회나무를 만날 수 있다. 3시간 땀 흘리지 않아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향적봉 등 등산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털개회나무를 볼 수 있다.


라일락과 수수꽃다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꽃인 만큼 이야깃거리도 많다. 라일락 꽃잎은 네 개로 갈라지는데, 다섯 개로 갈라진 꽃을 보면 사랑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어서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다. 네잎클로버와 비슷한 속설이다. 라일락의 하트모양 잎을 깨물면 첫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잎을 따 깨물면 당연히 쓰디쓴 맛이다.


라일락 중에서 1m 정도의 아담한 크기에다 향기도 진해서 조경용으로 인기인 나무가 있다. 미스김라일락인데, 1947년 미군정청 소속의 식물채집가 엘윈 미더(Meader)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털개회나무 씨를 채집해 가져가 개량한 품종이다. 그는 1954년 이를 조경수로 내놓을 때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을 따 ‘미스김라일락’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나무는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도 역수입했다. 우리에게 토종 털개회나무가 있는데도 미국에서 개량한 미스김라일락을 도입해 심은 것이다.


<미망>은 국운이 쇠락해간 조선 말기부터 6·25전쟁 즈음까지, 개성에 뿌리를 둔 한 가족 5대의 일대기를 다룬 세 권짜리 대하소설이다. 특유의 상업적 감각으로 개성의 거상으로 부상한 전처만과 그의 장손녀 태임이 중심이다. 태임과 이종상의 아들딸 세대들이 6·25전쟁 등으로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빠르게 시대에 적응해나가는 과정까지를 그리고 있다. <미망>은 개성지방의 결혼식·의복·음식 등 세부적인 풍속을 실감나게 복원해 사료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도 받았다.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 등이 박경리의 <토지>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주는 소설이다. 전태임이라는 강인한 인물은 <토지>의 서희를 연상시킨다. 필자는 <미망>을 토종 수수꽃다리 향기를 간직한 소설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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