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바스(Horvath) 팁
지난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Horvath, 2020)라는 책을 읽고 파일로 정리해 두었다. 성적처리까지 끝나 조금 여유가 생겨서 다시 꺼내어 읽다가 ‘뇌의 특성을 감안한 PPT 제작 및 발표 방법’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시 읽고 내용을 보완하면서 이 책이 언급하고 있는 ‘브로카/베르니케 병목현상’을 더 상세히 소개할 요량으로 검색했더니 이미 ‘발표를 잘하기 위해 뇌과학을 활용하라’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상세히 소개해 놓은 사이트(똘똘한 온달, 2020)가 있다. 덕분에 책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없어졌다.
PPT 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그 이유는 책, 혹은 그의 블로그 글을 활용하기 바란다. 이 책 내용을 유튜브에 음성파일로 요약하여 올려놓은 사람도 있다(https://youtu.be/CbFFvTv9fns).
● 호바스의 PPT 제작 팁
요약하여 제시하면 PPT 제작 시 활용할 수 있는 팁에는 1) 텍스트(문장)는 가능한 최소화할 것 2) 키워드 형태의 메시지도 최소화할 것 3) 직관적 이해가 가능한 이미지를 활용할 것 4) 각 슬라이드의 양식(예: 이미지와 키워드 위치)을 일관되게 유지할 것 등이 있다.
수업(발표) 시 활용할 수 있는 팁으로는 1) 다루는 주제를 매듭짓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2) 발표 말미에 핵심내용 요약해주기 3) 도입 부분 흥미 유발(점화효과)에 노력할 것 등이 있다.
강의나 발표용 PPT에 텍스트는 넣지 말고 필요하다면 핵심단어정도만 포함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브로카/베르니케 병목현상’이라는 뇌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타당해 보인다. 호바스가 주장한 뇌의 특성에 대해서는 <학습 무관 스마트폰 사용이 학습을 방해하는 이유>(박남기, 2021.07)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 떠오르는 질문
그동안 나도 한두 시간 정도 처음 만나는 대중(교육자·학부모 등)을 상대로 미래교육의 모습을 포함하여 큰 흐름을 소개하는 강연을 할 때는 그의 조언대로 이미지와 키워드 중심의 PPT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만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용이나 학회에서 하는 새로운 논문 발표용 PPT에는 이미지나 키워드만이 아니라 텍스트(문장)를 종종 포함시켰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것 같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텍스트가 많이(가령 절반 이상) 포함된 PPT는 뇌의 특성에 비춰볼 때 잘못 제작된 것일까? 교수자(발표자)가 수업용(혹은 학회 발표용) PPT에 텍스트를 포함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업용과 학회 발표용 PPT에는 어느 정도나 텍스트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까? 만일 텍스트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지 않다면 PPT를 활용한 강연 동영상에 자막을 첨부하는 것은 어떤가? 등등이다.
브로카/베르니케 병목현상
호바스가 PPT 제작 시 가능하면 텍스트를 포함시키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언어 관련 정보가 우리 뇌에 동시에 입력될 때 하나만 통과하고 나머지는 사라지는 브로카/베르니케 병목현상 때문이다.
당신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 책을 읽을 수 없던 것처럼, 당신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도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동안 당신의 슬라이드나 발표자료를 읽을 수 없다. 구어이든 문어이든 한 가지 방식으로 정보를 받는 사람이 동일한 정보를 다양한 방식으로 한꺼번에 전달받는 사람보다 훨씬 더 그 정보를 지속적으로 이해하고 오랫동안 잘 기억한다. 슬라이드나 발표자료에 텍스트를 포함시키면 상대의 학습과 집중력을 방해한다(Horvath, 2019: 32-33).
텍스트로 이뤄진 슬라이드를 가지고 발표하면 학습과 집중력이 방해받는 이유는 말의 속도와 눈으로 읽는 속도가 서로 달라 뇌가 혼선을 빚기 때문이다.
우리는 1분에 130개 단어를 말할 수 있다. 눈은 1분에 220개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빠르면 1,000개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슬라이드에 삽입된 단어(문장)와 말하는 단어(문장)가 사람들에게 동시에 제공된다면, 그들은 눈으로 읽은 단어와 발표자의 음성으로 전해진 단어 사이에서 뒤죽박죽이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음성을 통해 생성된 단어와 읽기에서 비롯된 단어 사이의 모순으로 인해 또다시 병목현상을 경험하게 된다(Horvath, 2019: 35).
자막과 맥거크 효과(McGurk Effect)
그렇다면 동영상 제작 시 발표자가 하는 말을 자막으로 포함시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까? 모 대학에서 학생 대상 비대면 강의 관련 애로사항을 조사했더니 교수가 제공하는 동영상에 자막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튜브 동영상들은 자막을 제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동영상 강의에서는 자막이 없어서 강의 이해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도 자막이 있으면 내용이 귀에 더 잘 들어온다. 제공된 동영상 화면에 들어 있는 텍스트와 자막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대면 강의와 달리 비대면 동영상 강의에서는 교수자의 강의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동영상에서 PPT 화면이 주를 이루고, 교수자가 한쪽 귀퉁이에 조그만 화면으로 나타나거나, 아예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이해도는 더 낮아진다.
이때 자막을 넣어주면 교수자의 이야기가 잘 들리게 된다. 자막은 입 모양 정보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교수자가 할 이야기를 미리 읽을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잘 들리지 않던 외국 영화의 대사도 외국어 자막이 붙으면 더 잘 들리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nry David Thoreau)가 한 이야기 중에 “우리는 이미 절반쯤 알고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Horvath, 2019: 46). 말의 속도보다는 자막을 읽는 눈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자막이 제공되면 우리 눈은 말하는 상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눈을 통해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이미 알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 상태에서 그의 강연을 보게 되면 당연히 잘 들리고 이해도 더 잘될 것이다.
이처럼 슬라이드에 포함된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자막은 ‘브로카/베르니케 병목현상’이 아니라 ‘맥거크 효과’를 가져온다. 맥거크 효과란 동일한 발음이라도 말소리를 내는 사람의 입 모양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맥거크 효과는 청각정보는 명확하지 않은데 시각정보는 좋을 때 더 두드러진다(위키백과, 맥거크 효과). 이처럼 시각은 청각을 유도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은 자유롭게 뒤섞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병목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Horvath, 2019: 51).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동영상 강연 자료를 시청하는 학생에게서 자막이 병목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시각이 청각을 돕는 맥거크 효과가 나도록 하려면 시각자료(동영상에 포함된 PPT 슬라이드)에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제공되는 PPT가 언어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은 단순한 시각자료, 그리고 굳이 필요하다면 키워드 정도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PPT는 순수한 시각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자막은 해독을 필요로 하는 언어관련 활동이 되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이 자료가 통합되어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감각 통합은 단순한 더하기 과정(additive process. A+B=A와 B)이 아니라 생태학적 과정(ecological process A+B=C)이다. 호바스(Horvath, 2019: 53)는 정원에 딱정벌레를 12마리 풀어놓으면 단순히 딱정벌레 개체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원의 먹이사슬, 흙 속의 영양소, 생존조건 등 정원의 생태계를 바꾼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결합되면 완전히 새로운 전체, 즉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가 나타나게 된다.
강의용(학술 발표용) PPT에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
일반적인 강연에서와 달리 이론 강의를 할 때 혹은 학회에서 학술 발표를 할 때는 나도 PPT에 텍스트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포함시킨다. 어려운 이론을 설명할 때 학생들이 미리 읽고 충분히 이해해온 상황이라면 굳이 텍스트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이론에 대한 정의나 핵심개념 등을 제목과 함께 문장으로 포함시켜놓는 것이 좋다. 내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 전에 그 텍스트를 학생들과 같이 소리 내어 읽어보면 이해의 바탕이 마련된다. 그렇게 한 후에 예를 들어가며 설명이라는 것을 덧붙이면 학생들의 이해도가 높아진다.
텍스트를 많이 포함시키는 경우는 내가 강의나 발표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시키지 못한 경우이다. 이때에는 차라리 핵심 부분을 PPT에 올려놓고 읽어가는 것이 좋다. 물론 전체 PPT를 그러한 방식으로 제작하여 발표한다면 아무리 학술 발표라고 하더라도 듣는 청중을 지루하게 할 것이다.
설령 학술논문 발표용 PPT라고 하더라도 텍스트만이 아니라 이해를 돕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청중의 이해를 돕도록 설명을 덧붙인다면 청중의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오래전 학회의 한 핵심 세션의 사회를 보면서 악보를 보고 읽는 식이 아니라 악보를 소화해 자신만의 빛깔로 노래 부르듯이 발표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발표자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작곡을 마치고 발표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다. 학회 발표라고 하더라도 기왕이면 이미지가 많이 포함된 PPT를 활용하면서 자기의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발표를 한다면 회원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