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교장 선생님이 베스트셀러 작가로 탄생

2024.09.27 20:53:35

 필자는 2006년 경부터 한국교육신문 리포터 활동을 했다. 이 지면을 통하여 교육 소식, 특히 지방 교육문화, 그리고 교단을 지킨 여러 선생님들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감명을 준 박주정 선생님의 교직여정을 글로 정리하였다.

 

저서,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

30여 년 동안 위기의 학생들과 동행

위(Wee)센터 모델

위탁대안학교 설립

위기학생 신속대응 24시간 부르미 운영

눈높이교육상 외 다수 수상

세바시 출연, 영화로 제작

다수의 언론사가 주목한 사랑과 헌신의 교육자

 

올해 2월, 그는 30여년 전에 교사로 출발, 헌신과 애정 가득찬 교직생활, 광주에서 교장을 끝으로 모두 내려 놓았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아직도 힘든 길을 가는지, 왜 가르치는 일을 택했는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유전자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니 한 어른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나라가 가난하여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 그때  그의 아버지는 서당에서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한자를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셨다. 당시에는 동네 젊은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들이 세운 공덕비가 여러 곳에 남아 있기에 볼 때마다 아버지의 냄새가 배어 나옴을 느낄 수 있다니 한 마디로 인향천리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이유 모를 폭행을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다. 이어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피할 수 없었던 분노와 울음을 잊을 수 없다. 그의 가족은 기둥을 잃은 채 가족이 흩어지는 등 힘든 삶으로 자주 울곤 했다.

 

그런데 교사가 되어서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눈물이다. 길 잃은 양떼처럼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포기는 없었다. 아파서 울었지만 울어서 아프기도 했다.

 

박 선생님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보다는 항상 못하는 쪽, 힘든 쪽의 아이들 곁에 서 있었다. 그가 만난 아이들 중에 모범적이고, 특기가 뛰어나고, 가정이 따뜻한 아이들은 저만치서 지켜만 봐도 잘 해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큰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얼굴에 상처와 원망, 어두운 그늘과 한숨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아니 쫓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이제 돌아보니 ‘교육’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빨간 프라이드로 50만km를 달리며, 견디지 못해 생명을 포기한 138구 학생들의 시신 옆에서 펑펑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에게 교육이란 ‘가르침’이 아니라 한마디로 ‘동행’이었다. 옆에서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학생들은 희망의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침침한 교실에서, 광야의 벌판이나 강가에서, 경찰서나 재판정에서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 나도 돌아서서 우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도 가끔 강의를 할 때 눈물을 흘리는 버릇이 생겨 보는 이들도 따라 운다.

 

늘 영혼이 찢긴 아이와 함께 했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부모와 휘청거리는 조부모와 함께 있었다. 처음 우리 집으로 불쑥 찾아와 막무가내로 비좁은 작은 집인데도 함께 동거하고 싶다고 버티는 8명의 학생으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족과 합집합의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난 것이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힘들어서 내심 끝내고 싶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또 다른 아이들을 몰고 들어왔다. 이 아이들의 밥을 삶아 함께 먹여야 하는 아내에게는 미안하기 그지없었고 교사 봉급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살림은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힘든 일을 말없이 받아들인 아내의 심성의 깊이를 잘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묵묵히 그 일을 잘 감당해 주었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교사로 지킨 교단 현장을 떠난 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청에서 장학사, 장학관으로 근무할 때는 제도적으로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정책개발에 동분서주 했다. 24시간 현장으로 달려가는 ‘부르미 제도’, 공교육 Wee센터의 첫 모델이 된 ‘금란교실’, 뜻이 모아진 선생님들과 함께 설립한 ‘용연학교’, 어려운 학생들의 손을 잡아준 ‘K-명장과 함께 하는 진로 캠프’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명칭의 교육 사업들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지금도 애착이 더 크다. 이런 공적들이 인정되어 '눈높이교육상'도 받았다.

 

선생님은 어느 방송국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적이 있다. 주변에는 90여분의 긴 방송을 유튜브로 10회 이상 보았다는 분도 있었다. 세바시 출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청자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한 고통의 눈물이 많은 시청자들에게도 어떤 울림이 되었으리라.

 

10여 명도 아닌 707명을 살렸다면서, 방송에서 다 말하지 못한 10년 세월을 글로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교직 여정을 책으로 정리해 보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나름 순수하게 일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랑이 될 것 같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전국을 다니면서 기관, 학교, 기업 등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는 한결같은 사람들의 반응과 함께, 출판사의 제의가 있었지만 망설였다. 하지만 끈질긴 요구가 있어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책을 출판하는 기회도 가졌다. 작가 초년생이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책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이 탄생하였다. 쓰고 고치고 몇 번을 다듬고 다듬었다. 이 과정에서 인생을 배웠다. 계속된 시행착오. 그러나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글 솜씨가 부족하여 수차례 출판사와 소통하면서 수정을 거듭하였다. 이렇게 책  쓰는 과정이 어렵다면 처음부터 안 썼을 것이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걸 몰랐다. 몰랐기에 용감했다고나 할까. SNS덕분인지 이 책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요즘에 여기저기서 강의 문의가 오고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독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체력이 소진되어 감을 느낀다.

 

그런데 아직도 10여년 세월을 함께 했던 707명과의 동거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708, 709, 710. 아픔도 진행 중이다. 내가 마지막 근무한 학교에 전학 온 한 학생이 날마다 힘들게 하여 연일 그 일을 수습하고 나니 몸이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고갈되어 가는 나의 영혼에 기름이 되는 것일까. 이 기름이 다 타고 바닥이 나는 날까지 아이들과의 동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넘어져 가는 그들을 일으켜 주고 싶다. 이것이 미래세대를 위한 나에게 주어지 소명이라 믿기 때문에  박 선생님은 오늘도 강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김광섭 교육칼럼니스트 ggs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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