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가 고개 숙인 여름이 저만치 가고 있다. 쭉 뻗은 철길은 언제나 그리움을 부른다. 끝없는 평행의 소실점을 바라보면 유년의 로망이 떠오른다. 그 로망을 반추라도 하는 듯 빠름의 일상을 잠깐 물리고 플랫폼에 선다.
지열과 복사열을 더한 플랫폼의 열기는 비릿한 쇠 냄새까지 더해져 송골송골 땀방울로 맺힌다. 가끔 아이를 보낼 때 배웅한 그 자리에 오늘은 주인공이 되어 몸을 싣는다. 열차는 덜커덩거림도 없이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고속으로 달린다. 열차 여행의 묘미는 완행열차처럼 쉼과 약간의 덜커덩거림이 있어야 하는데 빠른 속도는 로망의 아쉬움을 남긴다.
예년보다 빠른 추석이 생활의 간이역을 지나며 기다림과 기쁨, 슬픔과 회안이 녹아있는 어머니 역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억 속 제일 따듯한 곳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 집이다. 아마 어머니의 마음이 모자이크처럼 배어있어서일 것이다. 느림이 일상화됐던 그 시절, 추석은 왜 그렇게 더디게 오는지 기다림은 설렘을 품은 아름다움이었다.
추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객지에서 고향 집 찾는 일이다. 대처에서 버스, 열차, 승용차를 이용하여 인파에 휘말리고 기다리면서도 반갑고 즐거운 귀성길을 밟는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도 마음은 벌써 고향에 있다. 막히는 도로를 보면서 기다림은 발효를 더 하여 애틋한 감정을 발아시킨다.
잠깐 생각에 잠기는 사이 열차는 고속으로 질주한다. 속도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다. 멀어지는 남쪽을 뒤로 서울로 향하는 열차는 쭉 뻗은 철길과 전차선 사이를 빠르게 달리지만 왠지 무겁기만 하다. 차창 밖 눈여겨 볼 사이도 없이 익어가는 볏논이 판 듯 판 듯 지나간다. 빠른 속도는 경치에 대하여 음미할 시간조차도 주지 않는다.
길은 그리움이고 언제나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는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고속열차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객실이 한산하다. 열차는 가끔 폐역된 간이역을 지나치며 많은 역을 정차한다. 시간은 걸리지만 열차 여행의 묘미인 생각의 발효를 증폭시킨다.
노을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산과 들도 어둠에 묻혀간다. 땡땡땡 건널목의 종소리가 메아리치고, 눈이 가는 곳은 어둠 속에 가물거리는 불빛과 교회의 빨간 첨탑 그리고 빈 옆자리의 허전함이다.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게 간다. 아마 내 마음이 머물던 곳으로 간다는 기다림이어서 그런 것 일 게다. 집이란 무엇인지 고향이란 무엇인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이 상큼함을 새롭게 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열차도 추석 전날이면 얼마나 붐빌까? 기억의 타래를 차창 밖 밤하늘에 올리니 눈썹달이 서쪽 지평선 가까이 기울고 있다. 저 달이 둥글어지면 추석이다.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고향 집 어머니 마음은 추석 준비에 분주하실 것이다. 자식이 뭔지 여름을 지나며 봉지 봉지 준비한 것들을 챙기고 계실 것이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여든을 넘어 혼자 고향 집을 지키는 할머니의 영상을 돌려본다. 음력 칠월 말 뙤약볕 아래 굽은 허리로 마당과 창고를 오가며 키질도 하는 할머니의 추석 준비는 바쁘다. 추석 기다림을 하며 수확한 참깨, 콩, 토란대 등 자식에게 줄 만한 것을 갈무리하고 계신다. 참깨는 기름 짜 자식 줄 것이고 토란대 판 돈은 손주들 용돈 주실 거란다. 참깨 농사는 10명이 농사지어 한 명이 먹기도 힘들다 하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할까? 굼뜬 몸을 이끄는 모습이 안타까워 쉬면 되실 것인데 왜 힘들게 준비하느냐고 하자 자식 손주 주는 재미라고 한다. 할머니는 들일을 마치고 들어와서도 정작 허리가 굽어서 점심을 상에 올려놓고는 못 드신다. 찬밥에 오이냉국 한 그릇 부엌 바닥에 놓고 앉으신다. 그 모습을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도 항상 그렇게 드셨다. 아버지와 겸상하면 좋을 것인데 왜 그렇게 드시냐고 해도 이게 편하시다고 하셨다. 평생 불편하게 살아온 모습이 몸에 배어 일상화되었음이다.
우리의 어머니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돈 되는 것을 억척같이 모았다. 어머니의 부엌과 부뚜막은 평생 자식 뒷바라지로 기다림과 보고 싶음, 생활고로 얼룩졌다. 오로지 뒷바라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자신에게는 0점 자식에게는 100점이셨다.
자식이란 뭘까? 혼자 남은 할머니의 독백이 귀를 적신다. ‘자식들을 언제쯤 실컷 볼까? 맨날 품속에 들어오는 것 같다.’
추석을 앞둔 할머니의 촌집 마당에 고추와 맨드라미가 기다림의 허전함을 붉은 가을로 밝힌다. 자식은 철새처럼 때가 되면 나간다. 혼자 남아 기다리기로 하는 할머니의 시계는 느리게 간다. 허리 굽고 잇몸으로 앉은 할머니는 힘들어도 자식이 있어 흐뭇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은 지나가는 차들이 내 자식 차 같다며 동구 밖을 서성인다.
추석을 앞둔 설익은 보름달은 기다림으로 마을 밖을 내다본다. 자식들이 고개 내민 추석은 여름철 소낙비처럼 왔다 간다. 자식은 엄마의 가슴에 돌 얹어 놓고 평생 살다간 줄 모른다. 자식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할머니 이별의 말은 해도 해도 아쉽다. 자식 무사히 돌아가길 부탁 기원하는 눈물이 추석 기다림보다 더 진하다.
서서히 속력을 줄이는 열차와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자정 가까운 어둠 속에 환청처럼 들린다. 출발한 곳에서 다시 내렸다. 이제 자동차로 움직여야 집에 도착한다. 늦은 밤이지만 집 가까이 왔다는 느낌이 마음을 순하게 한다.
부모와 다른 시간을 사는 자식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 마음 알지만 내 자식 때문에 부모 마음 챙기기는 어렵다. 기다림의 마음은 멀리서 보면 풍경이고 가까이서 보면 기쁨이다. 자식은 올 때는 항상 반갑고 갈 때는 언제나 쓸쓸하다. 할머니의 바람처럼 이번 추석은 바쁘다는 핑계 잠깐 내려놓고 완행열차 타는 기분으로 부모님 곁을 함께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