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건강이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음건강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태껏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이라던 게 슬쩍 마음건강을 위한 방법이라고 둔갑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과 정신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는 게지요.
외국에서 개발된 ‘mind’와 관련 프로그램을 수입하면서 ‘마음’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번역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mind’는 ‘마음’이 아닙니다. 흔한 영어표현으로 “Are you out of mind?”는 “정신 나갔어?”, “Be mindful!”은 “정신 차려!”, “Where is your mind?”는 “정신 나갔냐?”입니다. ‘mind’는 흔히 정신을 뜻합니다.
마음이란 뜻으로 쓰일 때가 있기는 합니다. “You are in my mind”는 “넌 내 마음속에 있어”, “I changed my mind”는 “내 마음 바꿨어”입니다. 하지만 더 흔히 마음을 하트(heart)로 표현합니다. 그런데도 서양 논문에 나오는 mind가 거의 일률적으로 마음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개념들이 혼탁해지고 이상해졌습니다.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마음건강법은 일단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건강과 정신건강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법들을 가리지 못하고 사용하면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흔히 내뱉는 조언도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흔히 “마음을 비워라”고 조언해 줍니다. 그러나 마음을 어떻게 비울까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마음을 좋게 지녀라”라는 조언도 흔히 듣습니다. 그러나 무슨 마음을 어떻게 먹어야 되는지, 어떻게 지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음껏 살아라.” 아니,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껏 살란 말입니까. 모순이 아닌가요.
괴로운 마음을 위로해 주고 지지해 준답시고 이런 ‘아무 말 잔치’가 종종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땐 생각이 잘 안되니 이런 모순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콤한 말장난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잖아요. 그 사이에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고, 내가 달라지지도 않고, 단지 말장수의 지갑만 두둑해졌겠지요. 우리의 허해진 마음을 이용하는 현란한 말재주에 넘어가지 맙시다. 그 대신 정확한 팩트와 최신 과학적 지식을 통해 마음 개념을 정리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2014년도에 개최된 세계 심뇌과학 학술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n neurocardiology)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뇌는 머리에만 있지 않습니다. 심장에도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뇌를 두뇌라고 하고, 심장에 있는 뇌를 심뇌라 부릅니다. 두뇌는 당연히 생각을 관장하지요. 심뇌는 감정을 관장합니다.
내·외부자극으로 발생되는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 시그널이 총집결하는 곳이 심장이어서 오감의 본거지이기 때문입니다. 두뇌와 심뇌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된 상태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이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생성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세 가지만 알아도 마음건강을 지키는 데에 충분합니다.
첫째, 우리는 오관을 통해서 외부세상을 만납니다. 즉 눈·코·입·혀·피부를 통해서 외부자극이 들어옵니다. 이 자극이 오감을 일으킵니다. 오감은 반사반응이고, 감각이 되어 우리가 알아차리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0.2초 정도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반사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놀람(공포와 분노)·불쾌함(혐오)·좋음(기쁨)·슬픔 등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다윈은 이러한 감정이 인류보편적으로 표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놀랍게도 조선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명시된 일곱 가지 감정,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둘째, 반사적 반응은 휘발성이 강해서 자극이 사라지면 곧바로 따라 사라집니다. 하지만 큰 자극으로 인해서 큰 감정이 발생했다면 우리는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감정을 유발한 자극에 대한 정보와 함께 묶어서 마음에 저장해 둡니다. 실제로 기억력을 관리하는 해마와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가 서로 바로 옆에 붙어서 함께 작동합니다.
저는 이 저장된 감정과 생각 연결체를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감정단어는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이 포함된 ‘마음단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예를 들어 죄책감·열등감·정의감·고독감·질투심·수치심·허영심 등은 생각이 동반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지요. 죄라는 개념이 없으면 죄책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못하고 우열을 따지지 못하면 질투심과 열등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수치심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감정과 생각이 뗄 수 없이 얽혀있고 연결되어 있는 게 마음입니다.
셋째, 우리는 살아오면서 체험한 수백, 수천 개의 좋은 추억과 나쁜 트라우마가 깡그리 다 마음속에 저장되어 뒤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마음씨들이 들어 있는지 잘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언어(생각)가 발달되기 전의 아주 어릴 때 체험도 다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데,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를 들자면, 내가 옷을 옷장에 넣어두었는데 어디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옷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동기 때 어떤 경험을 했는가가 사람의 마음건강을 크게 좌우합니다. 부정적 마음씨가 지배하면 마음이 괴롭고 한스럽고, 긍정적 마음씨가 부각되면 자부심과 자존심이 커집니다.
이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마음지능입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한국어 마음이란 단어와 동일한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능력을 흔히 사회·정서적역량(SES) 또는 정서지능(EQ)이라고 부릅니다.
“학생이 성공하기 위해 어떤 능력이 필요한가?” 물어보면 챗봇이 자신 있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서지능은 학교·직장·사회생활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며 “행복한 아이가 지닌 지능은 일반적으로 IQ 테스트에서 측정되는 지능과는 다르다”, “행복한 아이는 정서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챗봇이 의존하는 빅데이터 베이스에 마음지능이란 개념이 없어서 정서지능이라고 대처했을 뿐입니다.
행복한 아이는 EQ와 IQ 둘 다 필요하며,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어내어야 합니다. 이성(IQ)과 감성(EQ)이 서로 연결되어, 생각을 다스리는 논리와 감정을 다스리는 심리가 합쳐져서, 아이가 합리적으로 사려 깊게 행동해야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지능은 즐거운 마음상태를 이루는 능력입니다. 구구단 같은 무미건조한 내용은 수백 번 반복해야만 간신히 머리에 기억되는 반면 강한 감정을 유발하는 내용은 자동으로 마음에 기억됩니다. 아마 그래서 공자님도 <논어>의 첫마디를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不亦說乎兒)’라고 학습의 즐거움을 피력했나 봅니다. 즐거움은 학생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학생의 마음을 움직이는 교육이 최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가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교육자이지 엔터테이너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남이 즐겁게 해주어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공부는 어차피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성장에 도움이 되면 하루하루가 뿌듯하고 즐겁습니다. 즐거움의 원천이 성장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강조해야 하는 개념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장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성장이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게 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나게 하는 창의적이고 즐거운 과정입니다.
행복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행복한 교육이어야 합니다. 행복한 교육이 바로 성공적인 삶을 위한 교육입니다. 이게 바로 아이들의 마음건강을 위한 최고의 예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