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역사] 유배의 고행에서 나온 역작, 김정희의 ‘세한도’

2024.09.09 09:00:36

 

조선 후기 서예가로 우리나라는 물론 청나라까지 알려진 김정희. 김정희는 중국에서 맥이 끊긴 서법을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고유의 서체를 완성했다.

 

김정희의 집안은 양반 중에서 양반 가문이다. 영조의 부마로 화순옹주와 혼인한 김한경이 양증조부이기에 예산 땅을 사패지(임금이 내린 논과 밭)로 받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었다. 순조 때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정순대비와도 친척이었다.

 

김정희 자신도 오늘날 차관에 해당하는 참판 벼슬을 한 고위 인사이다. 그러나 권력과 부귀영화가 어찌 영원한 게 있으랴. 1840년, 김정희의 나이 55세일 때 아버지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자신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가서 9년 동안 송계순과 강도순의 집에서 귀양살이했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것은 김정희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주변에 사람이 들끓다가 멀어져 외톨이가 되니 설움과 배신감으로 더 쓸쓸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에 중국을 오가는 역관(통역)인 이상적이 있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12번이나 왕래한 유능한 역관이었다. 이상적은 역관이면서도 시문에도 능해 중국에서 <은송당집>이란 시문집을 발간한 유명한 시인이었다.

 

이상적은 김정희의 신변에 관계 없이 중국을 오갈 때마다 그곳의 스승이나 친구들에게 김정희의 안부를 전하고 북경의 서점에서 최신 서적들을 구하다 제주도에 있는 김정희에게 보냈다.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김정희도 제주 귀양살이 5년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지만, 늘 한결같이 변치 않는 정성을 보인 제자 이상적이 남다르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가져다준 서책은 김정희의 유배지 생활을 외롭지 않게 했다. 특히 이상적이 귀한 서책인 120권 79책짜리 <황조경세문편>을 북경에서 구해 제주도에 보내준 고마움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도의 크기는 23cm×69.2cm이나, 청나라의 문인과 김정희 제자, 손재형이 받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정인보 등의 감상평 등 글월과 함께 두루마리로 표구돼 총길이는 14m에 달할 정도이다.

 

이상적을 생각하고 그리다

 

김정희는 어느 날 붓을 들었다. 갈필로 우측에 오래된 노송 두 그루를 그리고 그 뒤에 초가를 그렸다. 아무 꾸밈이나 장식이 없다. 초로의 나이에 귀양살이하는 처지에 무슨 가식과 체면이 필요할 것인가. 초가 앞 늙은 소나무 두 그루는 김정희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왼쪽에 조금 떨어져 우측의 노송을 바라보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가늘게 그려 제자 이상적을 표현했다. <세한도>는 논어의 한 구절 중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를 떠올리며 이상적이라는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스승 김정희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헌종 10년(1844), 동지사로 가는 이정응을 수행해 연경으로 가면서 가져갔다. 그리고 1845년 1월 13일 청나라 벗인 오찬의 초대연에서 이 그림을 청나라의 문인과 학자들에게 보여줬다.

 

연회에 참석한 오찬, 장요손, 장악진, 조진조, 반증위, 조무견 등 13명과 후에 합류한 3명 등 모두 16명이 시와 글로써 감상을 남겼으니 이를 ‘청유십육가’라고 한다.

 

김군(김정희)의 바다 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버렸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 반증위

 

이상적은 <세한도>를 제자인 김병선에게, 김병선은 아들인 김준학에게 물려줬다. 김준학은 1914년 1월과 2월에 앞부분과 청유십육가의 중간중간에 글과 시 등을 남기면서 자신이 <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를 거쳐 일본인 서예가이자 최초의 김정희학 연구가라고 자칭(自稱)한 일본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隣)에게 넘어갔다. 후지쓰카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세한도> 영인본 100부를 인쇄해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붓글씨도 예술의 하나로 평가해 ‘서예(書藝)’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진도 갑부 손재형이 일본 도쿄의 후지쓰카 집을 찾아갔다. 손재형은 후지쓰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며 <세한도>를 원했으나 거절당하자, 손재형은 두 달 동안 후지쓰카에게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하면서 그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잘 보관하라’와 ‘김정희학의 동문사숙’이라는 말과 함께 단 한푼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넘겨받았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인수한 뒤 1945년 3월 후지쓰카의 집이 도쿄 대공습을 받아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김정희의 수많은 작품도 함께 사라졌다고 하는데, 천운(天運)으로 <세한도>는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라 하겠다.

 

<세한도>의 주인이 된 손재형은 1949년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의 발문(댓글)을 받았다. 이후 손재형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집안 경제가 어려움을 겪어 <세한도>를 담보로 채무를 졌다. 채무를 갚을 길이 없는 손재형이 <세한도>를 포기하면서 손세기(孫世基, 1903~1983)가 1970년대부터 소장했고 장남 손창근이 소중히 간직하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하면서 우리가 <세한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죽기 전날까지 글씨 써

 

김정희는 1851년 다시 모함받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70세 되던 1856년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글씨를 썼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씨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

 

 

더 알아보기> 

 

1817년 6월, 김정희는 친구인 조인영과 함께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전문가를 데려가 북한산순수비 옆면에 글을 새겼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비석이다. 병자(1816)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 경축(1817)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확인했다.’

 

이 비석에 새긴 글자를 통해 김정희가 추구하려고 했던 학문 정신은 무엇일까요? (해설은 다음 회에)

민병덕 매헌윤봉길기념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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