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 전남 여도중 교장은 최근 시집 '구름 한 권'을 펴냈다.
허 교장은 자기 안에 누적된 시간의 갈피를 한 장씩 넘기면서 그 안에 서 시를, 그리고 '생'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그가 '시'와 '생을 붙잡고 싸웠던 숱한 시간은, 그가 오래 다짐했던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아야 할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그가 그 순간들을 오롯이 한 권의 시집 안에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시라는 예술에 담겨 있는 위반의 미학이 있어서일 것이다.
절벽을 그리다
감꽃처럼 떨어져 있는 개도에 갔습니다
활어처럼 한 발 한 발 둘레길 헤맸습니다
길은 언제나 벼랑 위에 똬리를 틀고 생을 흔들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이 담뱃불처럼 희미해질 무렵
절망의 못을 새벽처럼 깊게 박았습니다
누구나 삶의 한 발은 절망이라고
낭떠러지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얼마나 휘청거려야
절벽 앞에서도 두렵지 않게 서는지를 쇠가마우지를 보면 압니다
둥지는 지상이 아닌 허공에만 올려져 있고
새들은 절벽에서 나는 법을 배웁니다
섬들은 바람과 파도의 유언으로 절벽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바람과 파도를 만나야 가슴에 절벽을 키울 수 있을까요
절벽을 오를 때마다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들이 철썩거립니다
섬은 뿌리에 절벽을 키우며 살아간다고
섬과 섬을 안고 있는 바다처럼
하루하루
절벽과 절벽 사이를 걷는 것이
우리네가 사는 일입니다.
<<해설>>
신화는 신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과 본능을 암시하는 인류 전체의 자기 고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조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가치는 유한성이 아닐까.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은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는 유일성의 존재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존재이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는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에우리디케의 죽음)는 가르침을 주는 동시에, 그러함에도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오르페우스의 돌아봄)는 욕망의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는 기본적으로 인간 본질과 욕망이 실현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해당하고,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서는 필연적으로 위반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시집에서 천착하고 있는 허승호 시인의 시 세계는 '위반된 돌아보기'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가슴으로 누르고 살았다"라는 각오는 이번 시집을 통해 명백하게 위반되고 말았다. 그는 지나간 삶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있으며,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 돌아봄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돌아보았던 오르페우스의 눈에 비쳤던 그 눈빛처럼, 그리고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고 남은 그 빈자리처럼, 허승호 시인의 돌아봄은 "반성문같이 서 있는 여백"(안개)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여백 안에서 "부딪히고 어그러져 버렸던 날들/ 서로 붙잡고 놓지 않은 것이/ 사람살이"(「그릇 부부」)라는 사실을 거듭 드러내고 있다. ~ 돌아보면, 거기 삶의 여백이 있다 문신 (시인 우석대 교수)~
시인 약력
전남 순천생.
2021년 『인간과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 『디톡스 공부법』 『중학생활 백서(공저) 등이 있음.
여수시사편찬위원 역임, 여도중학교 재직, 여수시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