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봄은 어떤 빛일까? 설천면 벚꽃길 유채와 노량바다, 서면 예계마을 벚꽃 터널과 남색 바다, 상주 고개를 넘어가는 붉은 동백꽃과 앵강만 윤슬이 남해 봄빛이지만 일부분이다. 남해는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 언제나 두근거림 그 자체이다. 제주, 거제, 강화도를 둘러보았지만 아늑한 품과 부드러운 산세는 남해에 비할 수 없다.
4월에 접어들 때 아이들과 남면 다랭이마을을 찾았다. 홍현마을을 지나 한 고개 돌면 소치도를 품은 에메랄드빛 하늘이 수평선에 내려앉아 품을 벌린다. 아이들은 바다라고 외치며 윤슬이 예쁘다고 한다. 윤슬 참 어려운 우리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일상에서 벗어나 다랭이마을 지겟길 정자에서 간식을 먹으며, 파도 소리에 몽환에 젖어든다. 680여 개의 논다랭이와 삿갓배미 이야기, 108층의 논을 300여 년에 걸쳐 지게와 손으로 일구었던 이 마을 사람들의 근면함과 성실함, 어려움을 이기려는 생활 모습을, 눈을 반짝이며 듣는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그리고 이 체험을 엮어서 다랭이논에 스민 남해인의 정신을 사투리로 나타내는 수업을 하였다.
“쎄가 빠지고 지게를 지고 까꾸마글 오르고 하면 허리가 뿌라질 것 같심니더.”
잊혀져 가는 남해 사투리를 한 문장으로 나타내고 소리 내어 읽는다. 수업을 참관한 부모님들도 웃으신다. 남해는 경상도이지만 섬만의 특유한 어조와 톤이 스며 있어 대화를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랭이마을의 주름처럼 그려진 논두렁을 보면 그 노고가 지금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음이 고마울 뿐이다. 봄이면 언제나 찾아도 다랭이마을은 유채꽃 물결이 바다에 젖어 새롭게 다가온다.
4월 중순이다. 올봄 날씨는 지난해와는 다르게 변덕이 심하다. 남해 파라다랑스를 찾았다. 십여 년 전 상주면에 근무할 때 두모마을을 지나치면 다랑논 층층이 어우러진 노란 유채꽃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추석을 앞둔 9월이면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하얀 쌀가루를 층층이 인 다랑논 메밀꽃의 수줍은 향연이 유혹했다. 파란 가을 하늘에 대비되어 메밀밭 사이를 걸으며 사진으로 담으며 넋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근무지가 옮겨지면서 두모마을 다랑논의 유채와 메밀꽃 안부가 궁금했는데, 올봄 남해 파라다랑스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파라다랑스’는 ‘파라다이스’와 ‘다랑논’의 합성어로, 남해의 전통 다랑논 지형을 살린 감성 정원으로 상주면 두모마을 일원에 조성된 농촌 테마 공원이다. 남해 파라다랑스의 전경은 금산의 부소대나 상사암에서 내려다보면 황홀하다. 특히 가을 금산 단풍과 더불어 붉게 물드는 노을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제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 남면 다랭이마을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소가 될 것이다. 게다가 노도 문학의 섬과 연계하면 바다와 산, 하늘이 어우러진 감성이 색칠할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벽련마을 몽돌해변에서 바다의 시를 듣고 윤슬을 감상한다면 이탈리아의 아말피 해안에 버금가는 감성을 두를 수 있을 것이다.
사월의 봄은 깊어만 간다. 오월을 향하는 시점에 벌써 여름의 초록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이맘때 새로 돋아난 연한 연둣빛은 너무 부드럽다. 마치 피천득의 오월이란 수필에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며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고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부드럽다는 표현과 같다. 길어만 가는 사월 한낮 연둣빛 바람을 타고 뻐꾸기와 비둘기는 진종일 울다가 목이 쉰다. 무논의 붓 도랑에는 풀들이 무성하고, 애벌갈이를 한 논은 벌써 모내기 준비에 바쁘다. 농촌의 거친 숨소리는 태양 아래 허리를 조아린다.
이 활기차고 상큼한 모습을 보고 싶어 꽃으로 꾸며진 원예 예술촌을 찾는다. 유럽풍의 다양한 집들이 뷰 파인더 속에서 마음을 유혹한다. 봉화마을 길에서 올려다본 원예예술촌은 신록에 파묻혀 있다. 원예예술촌은 파독전시관 독일마을과 더불어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지 오래지만, 때를 잘 맞춰 가야 그 여정의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
예술촌 넓은 정원은 이른 봄 꽃진 자리에 돋아나는 새순의 흔들림으로 여리기만 하다. 연분홍 꽃사과 꽃이 사연을 방울로 매달고, 느리디느린 음악이 흐르는 카페의 보랏빛 등꽃은 또 한 번 걸음을 붙잡는다. 라일락 향기 가득한 정원이 여유롭다. 여러 사람이 아닌 혼자라서 그런가. 봄바람을 타고 흐느끼는 그 향기를 즐기는 것이 사치가 아닌가 하면서도 힐링의 멍을 때리며 생각을 붙잡는다.
자연이 준 배경과 인공미를 더한 조화로운 풍경이 서로가 등 돌린 시점에 어울려 사는 일이 중요함을 깨운다. 바위에서 지족해협을 바라보고 가슴을 열어젖힌다. 언제부터 스트레스가 현대인의 삶을 좀먹은 병이었지만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약간 더움을 느낀다. 초여름을 생각하게 하는 기온이다. 셔츠 단추를 열어젖힌다.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지만 싱그럽기만 하다. 그 땀을 식혀줄 예술촌 정원의 쏟아지는 분수가 하얀 종이배를 띄우고 있다. 연초록과 어울린 분수의 물줄기는 하늘과 바람을 담고 은구슬로 부서진다. 다시 솟아올라 부서지고 결합과 재결합으로 탄생하고 있다.
남해의 봄. 다랭이마을, 남해 파라다랑스, 원예예술촌 등 남해의 구석구석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나날이 푸르러져 가는 이 산 저 산,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이양하의 신록 예찬을 떠 올리며 공감의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