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끝자락,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10월 23일 저녁. 경기아트센터 소공연장으로 들어서자, 로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먼저 반겨주었다. 도시 속 회색빛 일상에 촉촉이 스며드는 음악의 향기를 찾아 모인 관객들 사이에는 반가움과 따뜻한 기대감이 흘렀다. 이날 무대는 제10회 올드보이즈콰이어(단장 박용선, 지휘자 송흥섭)의 정기연주회. 주제는 ‘친구여’.
무대 위의 조명이 서서히 켜지자, 인생의 황혼 속에서도 여전히 노래로 청춘을 살아내는 24명의 남성 합창단원들이 차분히 자리를 잡았다. 박용선 단장은 인사말에서 “10월의 멋진 날에 이곳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박미경 반주자의 첫 건반이 울리는 순간, 송 지휘자가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오프닝 송으로 합창단의 단가 ‘OLDBOYS CHOIR SONG’(송흥섭 작곡)이다.
우리 가곡 ‘강 건너 봄이 오듯’으로 문을 연 1부는 제목 그대로 그리움의 서정으로 가득했다. 이 노래를 듣는 동안 마음 한 켠에 묻어두었던 옛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의 따스한 온기.
‘시간에 기대어’에서는 묵직한 저음이 삶의 무게를 안고 흐르다가, 후반부의 화음에서는 객석에서 조용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바로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가사다. 이어진 ‘홀로 아리랑’에서는 노래가 민족적 정서와 개인의 고독을 동시에 품으며, 관객의 마음을 한껏 끌어올렸다.
특별히 1부 후반 우정 출연한 더플러스여성합창단(단장 송진숙)의 무대는 복사꽃색의 복장과 밝은 표정부터 신선한 대비를 선사했다. ‘노래가 만든 세상’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싱싱싱’을 통해 여성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생동감이 극장 안을 환하게 비췄다. 남성 합창의 묵직함 뒤에 이어진 이들의 노래는 마치 긴 겨울을 지나 피어난 봄꽃 같았다. 미소 띤 얼굴과 리드미컬한 손동작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2부의 주제는 ‘열정’이었다. 송흥섭 지휘자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박자에 따라 남성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리듬으로 엮여갔다. ‘기쁘게 춤추며 노래하라’는 아프리카 노래와 ‘관타나메라’, 그리고 주기도문 ‘바바에투’(솔로 양원섭)는 그야말로 지구 반대편의 열정과 영혼을 무대 위에 불러냈다.
특히 ‘바바에투’의 순간, 단원들의 얼굴에는 음악 그 자체가 깃들어 있었다. 라틴어도, 아프리카 언어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진심이 언어의 벽을 넘었다. 음악이란 결국 마음의 공명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특별출연한 색소포니스트 윤예찬의 무대가 펼쳐졌다. ‘Seagull’의 잔잔한 선율이 바다의 수평선을 그리듯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어진 ‘카르멘 판타지’에서는 불꽃 튀는 테크닉과 감성이 어우러져 장내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윤예찬의 연주는 마치 열정의 불씨를 단원들의 마음에 옮겨 심는 듯했다.
마지막 3부의 주제는 ‘희망’. 무대 조명이 부드럽게 변하며, 단원들의 표정에서도 묘한 평안이 감돌았다. ‘푸르른 날’(솔로 박용선)을 시작으로 ‘친구여’(솔로 양원섭), ‘사랑 Two’(솔로 이원해), ‘우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특히 ‘친구여’가 울려 퍼질 때, 객석의 공기가 한순간 멈춘 듯했다. “친구여, 가슴 부둥켜 안고 함께 걸어가 보자” 그 가사는 단순한 노랫말이 아니라, 서로의 세월을 함께 건너온 동행에 대한 헌사처럼 들렸다.
지휘자 송흥섭은 손끝 하나로 감정을 조율하며, 단원들의 숨결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냈다. 50대부터 80대까지의 단원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젊은 합창단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음색’이 묻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앵콜곡 ‘비빔밥’에서는 웃음소리가, 그리고 노사연의 ‘바램’이 울려 퍼질 때는 무대와 객석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노래는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공연이 끝난 뒤, 로비에서 가족 지인들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단원들의 얼굴에는 땀과 행복이 뒤섞여 있었다. “함께 노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느 테너 파트장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원 출신 송흥섭 지휘자와는 학창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 있다. 그는 언제나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음악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이번 공연의 주제가 ‘친구여’로 정해진 것도, 어쩌면 그가 평생 간직해온 가치의 표현일 것이다.
이날 무대는 단순한 합창 공연이 아니라, 인생의 서사와 우정의 노래가 한데 어우러진 축제였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정,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기쁨, 그리고 누군가 곁에 있다는 위로. 그것이 바로 올드보이즈콰이어가 전하는 음악의 본질이었다. 가을밤, 무대를 떠나며 문득 떠올랐다. “친구여, 우리 아직도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이날 밤의 선율은 지금도 마음속에서 잔잔히 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