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訓’ 봉투

2005.04.28 11:05:00

愚 樂 協 등 외자로 좌우명 내린 전통

산골학교 졸업식
10수년전인 1948년 속리산 두메 아곡초등학교에 있었던 별난 졸업식이 생각난다. 여느 졸업식은 길어야 한 시간 안에 끝나는데 아곡초등학교 졸업식은 으레 서너 시간 끌게 마련이다. 졸업생 전원에게 우등상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어의 우등상, 미술의 우등상은 물론, 축구의 우등상, 독서의 우등상, 봉사의 우등상… 학생 하나하나의 개성과 장기를 발굴하여 우등상을 준다. 이어 ‘마음의 꽃씨앗’ 봉투가 전달되며, 이 꽃씨앗을 심어 그 열매를 내년 졸업생에게 물려주어야 된다.


아름다운 동문의 결속을 이렇게 꽃씨물림으로 다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졸업생들이 애독했던 때묻고 해어진 책을 손수 깨끗이 손질하여 재학생에게 전달하는 차례다.


졸업식은 담임선생과 졸업생간에 결속의식으로 이어진다. 담임선생이 각각 졸업생의 개성에 맞추어 좌우명 하나씩을 모필로 써 넣은 종이가 든 봉투의 전달식인 것이다. 졸업식은 이렇게 동창과 동창간의 횡적관계, 사제간의 종적관계를 종횡으로 엮어 영원한 관계로 연장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사도(師道)를 개척하고 닦고 승화시킨 분이 지금은 작고하고 없는 김유현 교장선생님이시다. 물론 이 아름다운 물림 교육은 교장 선생님이 독창적으로 창안해 낸 것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전통 교육에 주옥처럼 박혀있던 것들을 빼내어 오늘에 들어 맞춘 것이다.


한양의 四學(사학)이나 영호남의 유수한 서원들에서는 글을 읽고 떠나는 서생에게 스승이 ‘訓’이라 쓴 종이봉투 하나씩을 내린다. 그 봉투안에는 그 서생의 성격이나 의중에 두어 행실을 바로 잡게하는 좌우명같은 글이 들어있다. 그 글은 번잡하지않고 외자다. 너무 영리하여 설치리라 우려된 서생에게는 어리석을 ‘愚’자를, 매사에 잘 비관하는 서생에게는 ‘樂’자를, 자기주장이 강해 화합이 잘 안되는 서생에게는 ‘協’자를 내리는 식이다. 제자는 이 훈자를 간직하며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이를 꺼내어 마음을 잡는 지침을 삼았던 것이다. 이 옛 스승의 전통을 재현 시킨 것이다.

책물림 평생연분
우리 옛 말에 책 동생, 책 아들, 책 손자 라는게 있었다. 책 물림으로 혈연을 맺는 지식혈연(知識血緣)의 호칭인 것이다.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다 배우고나면 ‘책떼기’라는 의식을 베푼다. 서당 상석에 떼고난 책과 떡을 빚어놓고 큰절을 한다. 그리고 그 책을 특정의 후학에게 물려주는 책물림 의식이 뒤따른다. 이로써 책 동생이 탄생하며, 책돌림으로 맺어진 이 연분은 평생 계속된다.


과거에 급제한 기혼 선비가 미혼의 선비에게 책을 물리면 책 아들이 된다. 그래서 옛날 책 맨 뒷장을 보면 몇 대(代)씩 이어 내린 물림족보가 적혀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책 할아버지 가운데 유명한 학자나 벼슬아치가 나오면 영광으로 삼고, 또 가문의 자랑으로 삼기까지 했던 것이다. 책장을 찢으면 피가 난다는 교훈도 이 책을 사이에 둔 의사혈연(擬似血緣)에서 비롯됐는지 모르겠다. 지식을 소중히 하는 싱그러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이라고 책 물림의 큰 뜻을 못 살릴 때마다 치솟는 교과서 값에 학부모가 쪼들리고 보니 더욱 이 전통이 돋보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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