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인구 배출, 정치적 망명지 등 ‘구원의 공간’ 역할도
조선족 “한반도·만주 연계 매개체인 동시 ‘半한국인’화”
‘동북공정’ 통해 만주·한반도 단절, 만주사회 안정 꾀해
명칭의 유래 ‘만주’라는 명칭은 청 태조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정권을 건립하면서 자신을 ‘만주’칸(汗)이라 부르고 1635년 청 태종이 여진인을 만주인(滿洲人)으로 개칭한 후, 점차 부족명칭에서 지명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왔다. 지명으로서의 ‘만주’는 처음에 요서(遼西)・요동(遼東)지방을 지칭하였지만 곧 만주전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청말 민국(民國) 초에는 만주가 ‘동삼성’(東三省 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으로 불렸다. ‘만주’ 명칭은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조직명칭(中共滿洲省委員會, 東・西・南・北滿軍區 등)이 말해주듯, 중화민국 시대까지도 중국인들에 의해 사용됐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만주’ 대신 ‘중국 동북지구’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만주’ 명칭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과 “만주가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다”는 주변의 여러 견해를 연상시켜주기 때문이다.
만주국(1932-1945) 말기인 1940년대의 행정구획도(일제하 만주국 연구, 일조각 1996) |
전통시대의 요동(만주): 동아시아 변동의 진원지(震源地) 요동(만주)지역은 위도가 높아 농경이 곤란하고 주거환경 역시 열악했다. 따라서 요동은 한족(漢族)에게 매력적인 삶의 터전보다는 ‘미개한 이민족의 생활공간’ 정도로 인식됐다. 그 결과 요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한족의 통치권 밖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목축업이나 삼림업에 종사하는 민족의 차지가 됐다. 요동의 많은 유목(초원)민족이 한족의 간섭을 크게 받지 않았고 때로는 강대한 힘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요동을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민족 가운데 우리 민족은 고구려와 발해를, 선비모용씨는 전연・후연을, 거란족은 요를, 여진족은 금을, 몽고족은 원을, 만주족은 청을 건국했다.
특히 요와 금의 건국은 한족 문화권과 요동을 발판으로 한 유목문화권 사이의 우열관계에 변화를 초래했고 유목문화를 중원에까지 떨치는 계기가 됐다. 금에 의한 북송의 멸망은 유목민족이 한족문화권을 절반 이상 차지한 사건이었다. 몽고초원과 일부 요동지역을 기반으로 흥기한 몽고족의 금・고려・남송의 정벌과 유라시아 대륙의 석권은 동아시아 및 지구상에 일대 격변을 일으켰으며, 동양 유목세력의 강대함을 만천하에 알린 동시에 동・서양의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켜 동・서양인에게 새로운 세계인식을 가져다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요동에서 흥기한 유목(초원)민족들의 관내 및 한반도 진출과 정복은 다른 지역에서 야기된 변화보다도 동아시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고 그 빈도도 잦았다. 이러한 점에서 요동(만주)은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혹은 ‘진원지’와 같은 작용을 했던 것이다.
만주국 수립(1932년) 이전인 1920년대 길림성 장춘역의 모습과 역에서 출발하는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속 증기기관차의 모습.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을 위한 첨병 역할을 했다 |
근・현대의 만주: 동아시아 모순의 결절점(結節點) 청조를 수립한 만주족은 만주를 ‘조상의 성지’라 하여 봉금(封禁)지역으로 선포하고 이민족 유입을 금지시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무주공산(無主空山)’처럼 변했다. 이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정책을 표방하고 있던 제정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아편전쟁(1840년)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곤궁에 처한 청조를 겁박해서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을 맺고 각각 흑룡강 이북의 땅(60여만㎢)과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약 40만㎢)를 빼앗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조는 제정 러시아의 남침저지, 관내지역의 사회모순 해소, 재정궁핍의 타개를 위해 1860년대 이후 봉금정책을 완화하고 한족의 만주이민을 방관・장려했다. 그 결과 한족의 이민이 급증했고 한족의 관습과 문화, 경영방식 등도 만주에 전파되면서 만주사회는 ‘변지(邊地)’에서 ‘내지(內地)’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근대 양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은 대륙으로, 러시아는 원동(遠東)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관동주(關東州)뿐만 아니라, 남만주에 대한 배타적 권리까지 확보했다. 국민당의 북벌(北伐) 완수는 만주에 기반을 둔 봉천군벌의 협조와 역량에서 기인되었으며 일본의 중국침략을 앞당겼다. 일본의 중국침략(만주사변)은 만주에서 쳄滂퓸解? 괴뢰 ‘만주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만주국’의 출현은 만주를 둘러싼 중국・소련・일본 사이의 각축을 일시 잠재운 반면 중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의 기존질서를 흔들어놓았고, 결국에는 동아시아 사회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소련군의 대일(對日) 선전포고와 만주점령은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 그 뒤를 이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여는 모두 만주를 매개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남북분단 및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고착시키는 등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다른 한편 근・현대 만주는 ‘동아시아의 모순해소를 위한 돌파구’와도 같았다. 만주는 한족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관내의 과잉인구 및 경지부족 문제를 완화시켜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으며,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이어주는 접점이었다. 만주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지였다. 만주는 일본의 대륙진출 교두보로서 제국주의 침략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일본 본토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실험대상의 땅’이기도 했다. 또한 만주는 자국에 기반이 없는 일본인에게도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 혹은 ‘유사망명공간(類似亡命空間)’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만주는 한반도의 과잉인구 배출구로써 모순을 완화시켜주었고 한반도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조선의 항일분자에게는 정치적 망명지이자 조국해방을 위한 기지였다. 만주는 유태인이나 중앙아시아에서 도망쳐온 이슬람족(回族),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소련에서 탄압받다가 도망쳐온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에게도 생활근거지였으며 ‘구원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만주는 동아시아(부분적으로는 유라시아)의 모순을 해소시켜주는 ‘돌파구’였고 새로운 삶의 ‘안식처’였으며 동아시아 주변민족의 인적・물적 교류를 촉진시킨 ‘동아시아 문화의 매개지역’이기도 했다. 반면에 만주는 동아시아의 기존모순에다가 주변민족의 집결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모순까지 중첩되면서 ‘동아시아 모순의 결절점’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 민족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만주는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으로 바뀌었고 동아시아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만주와 한반도 만주(요동)는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고토(故土)이자 우리 조상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정학적으로 만주는 한반도와 대륙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혹은 대륙진출의 관문이자 교두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선비족의 모용씨가 고구려를, 거란족・여진족・몽고족이 고려를, 만주족이 조선을 침략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만주는 한반도에 끊임없는 전운(戰雲)을 몰고 오는 ‘화근(禍根)의 온상’이자 ‘시련의 원천’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인들의 만주이주를 계기로 만주는 우리 역사의 범주로 편입되었다. 조선왕조 시기 조선인의 월경(越境) 및 이민은 청조의 만주개간 및 재정확보에 도움을 주었고 조선의 사회모순을 완화시켜주었다. 반면에 그것은 조(朝)・청(淸)간의 외교문제를 야기했고 양국간의 국경선 획정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 이주민을 대륙침략을 위한 첨병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조선인 이민자는 중국인에게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앞잡이’로 비쳐지기 시작했고, 중국인으로부터 미움과 경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역시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뒤 조선인 이민자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그들을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록 만주는 항일근거지였고, 일부 조선인에게는 꿈을 실현시켜준 안식처였지만, 대다수의 재만 조선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부 조선인이 중국인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빌붙어 살고 있다는 재만(在滿) 조선인 내면의 자괴감을 덜어줄 수 있던 유일한 위안거리이자 자랑거리였다.
한편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재만 조선인을 증오했던 중국인들, 특히 국민당 계열의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이나 조선마을을 습격하여 살해・폭행・강간・약탈 등을 자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 와중에 1944년 7월 당시 230만 명이었던 재만 조선인 가운데 80여 만 명이 귀국하였다.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한 뒤 중국에 잔류한 조선인은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이 됐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참여, 북한정권의 존속에 일익을 담당했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부정적 역할도 했다. 그들은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중국국민으로서의 국민의식을 공유하면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중국 조선족은 반(反)우파투쟁(1958년)과 문화대혁명 때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에 기초한 민족단결과 ‘한족화(漢族化)’를 강요당하면서 갖가지 고초를 겪었다. 연변(延邊)에서만 2천여 명이 사망했고 3천여 명이 불구자가 되었으며, 수만 명이 북한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조선족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혈맹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고, 남한의 사회상이나 문화를 중국사회에 전파시켜주었다. 조선족은 문화적・경제적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연계시켜주는 인적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반(半)한국인’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한반도의 급격한 정세변화(즉 북한정권의 붕괴나 남북통일)라도 생기면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대규모의 조선족은 한반도로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대규모의 북한사람들(지도부를 포함해서)도 한반도의 통일과정에서 만주로 도피할 수 있다. 자칫 만주는 ‘한민족의 근거지’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를 단절시켜 만주사회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를 예측・대비해서 그 변화를 중국 측에 유리하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다. 만주는 여전히 ‘동아시아 질서 변동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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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는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의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본 요동・만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