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표준의 물결과 서울교육의 응답
2022년 11월 30일, 이제는 뉴 노멀로 자리 잡은 생성형 AI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날입니다. 당시만 해도 생성형 AI를 실제 수업과 평가에 도입할 수 있다는 기대는 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세종대왕 맥북 투척 사건’ 같은 해프닝을 보며 생성형 AI의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AI는 신기했지만, 실질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쓰기에는 한계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AI는 학생들의 과제물 깊숙이 침투할 정도로 정교해졌고, 이제 교육현장은 이 거대한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기술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전 세계 교육계는 ‘인간의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2024년 발표한 ‘교사 및 학생을 위한 AI 역량 프레임워크’를 통해 인공지능시대의 핵심 가치를 ‘인간의 주체성’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는 AI 역량이 단순히 기술 활용 능력을 넘어, 인간이 목적에 맞게 AI를 통제하고 이용하는 능력임을 시사합니다. OECD 역시 PISA 2025부터 디지털 환경에서의 학습을 새로운 혁신 영역으로 지정하며, 미래 시민의 역량을 단순한 기술 활용력이 아닌 ‘기술을 통한 사고의 확장’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EU가 「AI법」에서 교육 분야를 고위험 영역으로 분류하며, 데이터 주권과 윤리 가이드라인을 강조하는 이유도 명확합니다.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사고 체계와 가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2025 AI 교육 종합계획’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AI 교육을 일부 교과에 한정시키지 않고 공교육이 책임져야 할 보편적 시민 역량으로 선언한 것은, 기술의 물결 속에서 학습자의 주체성을 지켜내려는 공교육의 의지 표현이기도 합니다.
AI 소양, 기술의 범위를 넘어 문해력으로
그동안 AI 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컴퓨터 코딩 문법을 익히거나 복잡한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교육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인간과 AI가 소통하는 주된 인터페이스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인류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프롬프팅은 단순히 AI에게 명령어를 입력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좋은 프롬프트를 작성하려면 해결하려는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맥락을 설정하며,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언어로 의도를 정교화해야 합니다. 결국 AI 소양 교육의 핵심은 도구 조작 능력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사고력이 전제된 생각의 구조화에 있습니다. 특정 교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교실에서 AI 기초 소양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어 시간의 비판적 읽기 역량은 AI가 생성한 텍스트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는 힘이 되고, 수학의 문제해결 능력은 알고리즘이 내놓은 결과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근거가 됩니다. 영어교육에서 중시하는 대상과 목적에 따른 표현의 적절성은 AI의 결과물을 용도에 맞게 다듬는 정교한 조율 능력이 됩니다. 기술은 화려하게 변하지만, 그 기술을 움직이는 동력은 여전히 우리가 교실에서 가르쳐 온 보편적 사고의 힘입니다.
실질적 역량 강화를 위한 정교한 교수설계의 힘
AI 활용이 일회성 체험을 넘어 학생의 실질적인 역량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을 대하는 태도와 학습과정을 들여다보는 정교한 교수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기술은 배움의 보조자일 뿐, 실제 배움의 밀도를 결정하는 것은 교사가 설계한 수업의 구조와 평가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 주체적 의사결정자로서의 학습자
AI는 학습자에게 무수히 많은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 피드백이 학습자의 성장이 아닌 학습의 외주화로 흐르는 순간 배움은 멈추고 맙니다. 따라서 교수설계의 첫 번째 원칙은 학습자를 AI 피드백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권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AI의 제안을 무조건 수용하는 대신, 자신의 학습목표와 의도에 비추어 선택적으로 채택하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글쓰기 과정에서 AI가 제안한 문장 수정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가이드할 필요가 있습니다. “AI의 제안 중 어떤 부분을 수용하거나 거절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업의 핵심 활동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은 “내 글의 어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 표현은 거절하겠다”거나 “논리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이 단어는 수용하겠다”라는 식의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일 때, 학생은 기술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주도성을 갖게 됩니다.
● 루브릭(Rubric), 메타인지를 깨우는 성찰의 나침반
실질적인 역량 향상은 성찰에서 비롯되며, 그 성찰의 근거는 교사가 제시하는 명확한 평가 기준인 ‘루브릭’에 있습니다. 루브릭은 단순히 결과물을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학습의 전 과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나침반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수업 시작 전, 학생이 도달해야 할 역량의 지표를 구체화하여 제시해야 합니다. 학생은 AI와 협업하는 매 순간 루브릭을 확인하며 자신의 위치를 점검합니다. “AI의 도움을 받아 보완된 논리가 루브릭의 최고 단계에 부합하는가?”, “AI가 제안한 데이터가 객관성을 갖추었는가?”를 스스로 묻게 하는 것입니다. 기준에 근거해 자신의 학습과정을 반성하는 메타인지적 습관은 AI시대에 가장 강력한 인간 고유의 역량이 될 것입니다.
설계자로서의 교사, 그리고 공교육의 책무
이러한 역량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서울시교육청이 도입하는 진단검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숫자로 남느냐 성장의 밑거름이 되느냐는 결국 교사의 몫입니다. 검사 결과로 확인된 학생 간 기초 소양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도구 활용에 능숙한 학생들에게는 어떤 깊이 있는 가치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처방이 필요합니다.
기초 소양이 부족한 학생에게는 AI를 통해 배움의 문턱을 낮춰주고, 우수한 학생에게는 기술의 윤리적 이면을 성찰하게 하는 맞춤형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합니다. 모든 수업에서 디지털 도구가 연필처럼 자연스럽게 쓰이되, 그 목적은 언제나 학습자의 성장을 향해야 합니다. 평가할 것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수업 중에 충분한 성찰의 기회가 주어지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공교육이 지켜내야 할 전문성의 영역입니다.
사람이 주인이 되는 미래 교육의 길
AI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교육의 종착지는 결국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은 AI를 조작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니라, 수많은 정보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해 나가는 마음의 근육입니다.
루브릭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자신의 배움을 성찰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들이 걸어가야 할 미래 교육의 길입니다. 기술은 변해도 교육의 본질인 성장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다시 한번 교실의 문을 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