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 거란 등 족속과 문화 포괄 제국적 면모 보이기도
고대국가 태동, 문화표준 정립 한국고대사 진원지, 만주
한국 및 동북아고대사 시각 교차시켜 다각적 접근 필요
2005년 11월 12일,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한지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흔히 만주라 불리는 중국 동북지방의 관문 선양공항(瀋陽空港)에 도착했다. 공항 문을 나서자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체감온도가 서울보다 10도 이상 낮은 것 같았다. 만주 땅을 처음 밟는다는 대학원생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해 한다. 광활한 대평원, 그 너머로 펼쳐지는 지평선에 넋을 빼앗긴 듯했다.
지난여름 동안 풀숲에 가려있었을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낙엽이 떨어진 청명한 가을날을 골라 만주 땅을 찾았는데,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한반도와는 사뭇 다른 날씨와 지형을 마주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정이 워낙 빡빡해 공항 주변의 이국적인 풍광을 마음껏 즐길 겨를이 없었다. 필자와 대학원생을 태운 차량은 곧장 고구려의 발흥지인 환런(桓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0분쯤 달리자 구릉이 하나 둘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제법 높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리자 8년 전에 답사했던 고구려 변우산성(邊牛山城)이 둥근 자태를 뽐내며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 더 달리자 고구려시기에 ‘부경(桴京)’이라 불렸던 다락창고가 눈에 뛰기 시작했다. 압록강 지류인 훈강(渾江) 유역으로 들어서자 산세가 조금 완만해지면서 들판은 더욱 넓어졌다. 어느 마을을 가나 옥수수를 가득 채운 부경이 눈에 뛰었다. 바로 이곳이 고구려 발흥지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옆에 앉은 대학원생도 한반도와 너무나 흡사한 지형에 놀랐는지, “선생님, 제 고향 홍성과 너무 비슷한데요”라고 말한다.
고구려 발흥지인 훈강유역의 환런분지 전경. 오른쪽 마을이 하고성자고성, 뒤쪽 산이 오녀산성이다. |
그렇다. 우리는 만주라고 하면 흔히 광활한 대평원을 떠올린다. 고구려라고 하면, 중무장한 기마병들이 광활한 만주 곳곳을 누비던 모습을 떠올리고. 만주 서북쪽에는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이 기다랗게 뻗어 내리며 몽골초원과 경계를 이룬다. 동북쪽에는 샤오싱안링(小興安嶺) 산맥이 뻗어 내리며 시베리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에는 장백산맥이 동서로 기다랗게 놓여 있으면서 한반도와 경계를 이룬다.
지리적인 의미에서 만주는 이들 세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가리킨다. 이들 산맥 사이에는 랴오허(遼河)와 쑹화강(松花江)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두 강 사이에는 높다란 산줄기가 없고 한반도보다 더 긴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만주를 광활한 대평원이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와 동행했던 대학원생이 선양공항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잠시 넋을 잃은 것도 이 대평원에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주에 광활한 대평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랴오허와 쑹화강 본류 좌우로는 광활한 대평원이 펼쳐져 있지만, 그밖에 다른 지역에는 크고 작은 산맥들이 종횡으로 뻗어 있다. 그 사이로는 랴오허나 쑹화강의 지류 그리고 압록강 지류를 따라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나 하곡평지가 펼쳐져 있다. 일찍부터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곳도 주로 이러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은 이를 잘 말해준다.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도 이러한 지역에서 발흥했다. 고조선 초기의 중심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거대한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 천산산맥 서북쪽의 구릉지대로 추정된다. 부여의 중심지는 쑹화강 중류의 지린(吉林) 지역인데, 동남으로는 비교적 높은 산지가 이어지고 서북으로는 구릉성 평지가 펼쳐진다. 고구려가 발흥했던 훈강(渾江) 유역도 장백산맥이 뻗어 내린 산간지대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으면 만주가 아니라 마치 한반도의 평야지대나 산간지대를 온 듯 착각이 든다. 필자와 동행했던 대학원생이 번시를 지나 환런에 들어섰을 무렵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와 자연지형이 비슷한 만주 중남부의 구릉지대나 산간지대 곳곳의 들판을 배경으로 농사지으며 생활을 영위했다. 이를테면 농경족이었던 셈이다. 중국 사람들은 만주 중남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쳐 농사지으며 생활하던 우리 조상들을 예맥족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만주에 농사짓기 좋은 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주의 서쪽 지역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초원이나 사막이 많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수풀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한편 말이나 양을 방목하며 생활했다. 반렵반목(半獵半牧)의 생활을 영위했는데, 역사적으로 동호(東胡), 선비(鮮卑), 거란(契丹) 등으로 불린 족속이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 만주의 동쪽 지역은 날씨가 춥고 산림이 우거져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수렵민이었던 셈인데, 지금 만주족의 조상으로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으로 불렸다.
만주에는 농경민인 예맥족뿐 아니라 유목민과 산림족 등 여러 족속이 이웃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족속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서로 문화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발히 교류하기도 했다. 더욱이 만주 서북쪽을 통해 일찍부터 우수한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었고, 서기전 4~3세기경에는 중국의 전국(戰國) 연나라가 요동으로 진출함에 따라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만주지역은 한반도보다 한발 앞서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던 선진지역이었던 셈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은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고대국가로 성장했고, 부여나 고구려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대국가로 발흥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룩한 선진문화는 초창기에는 주로 정치적 격변에 따른 유이민 파동을 따라 한반도 중남부로 전파되었다.
삼국의 건국설화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보다 한발 앞서 선진문화를 수용했던 부여에서 남하했다고 한다. 종래 부여와 고구려의 무덤양식이 전혀 달라 주몽의 남하설을 부정하기도 했지만, 최근 환런의 망강루(望江樓) 고분군에서 부여 계통의 유물이 다량 출토됨에 따라 그 역사성이 조금씩 확인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에서 남하했다고 하는데, 서울 석촌동의 거대한 돌무지무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신라 역시 고조선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철기유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만주는 고대국가들이 태동하고, 또 그들이 이룩한 선진문화를 한반도 중남부로 전해주던 한국고대사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다만 고구려 이전에는 이러한 역사 전개과정이 단속적(斷續的)으로 이루어졌다. 고조선이나 부여가 예맥족 전체를 포괄하는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한반도 중남부에 이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만한 정치체가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위상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있는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발흥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입지조건을 적극 활용하여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하는 한편, 부여의 중심지였던 쑹화강유역과 고조선이 발흥했던 요동지역까지 석권하여 만주 중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흥기했던 예맥족 전체를 통합했다. 이로써 고조선 이래 흥기했던 예맥족의 여러 주민집단은 고구려라는 용광로로 용해되어 하나의 역사체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고구려는 예맥족을 통합하여 민족사의 근간을 마련한 존재인 것이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도 정치적 통합이 진행되어 백제와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 이들은 고구려와 대립과 교류를 반복하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이에 따라 삼국은 시간적 선후를 달리하며 비슷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밟아 나갔는데, 대체로 백제나 신라가 고구려를 뒤쫓는 형국이었다. 가령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1~3세기에 부체제(部體制), 4~6세기 중반에 중앙집권체제, 6세기 중반~7세기 후반에 귀족연립체제 등으로 전개되었는데, 백제나 신라도 1~2세기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또한 고구려는 4세기부터 각지에 성곽을 축조하고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제도를 정비했는데, 백제는 5세기, 신라는 6세기경에 고구려와 유사한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한국 성곽문화의 근간을 이룬 고구려 석축성벽인 고검지산성 북벽. |
이러한 양상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정교하게 축조하는 고구려의 축성술은 백제나 신라뿐 아니라 고려를 이어 조선시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또한 무덤 양식도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는 돌무지무덤, 백제는 토광묘와 돌무지무덤,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 등으로 각기 달랐지만, 고구려 지역에서 먼저 돌방흙무덤으로 전환되더니 백제나 신라도 이를 뒤쫓아 갔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확립된 정치체제나 선진문화는 일정한 시차를 두며 백제나 신라로 전승되어 삼국문화의 표준으로 정립되었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도 이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문화적 동질성이나 역사적 유대감을 강화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 후반기에 이르면 중국인들도 삼국을 ‘해동삼국(海東三國)’이라 부르며 동일한 역사적 범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고구려의 역사적 위상을 우리 민족사의 범주 안으로만 가두려 해서는 안 된다. 고구려의 외연은 5세기 이후에도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예맥족뿐 아니라 말갈(만주족의 조상) 나아가 만주 서부의 거란의 일부까지 포괄했다. 이들 가운데 말갈의 일부는 고구려인으로 동화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생활양태가 달라 고구려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종족으로 남아 있었다.
고구려는 예맥족을 중심으로 여러 족속을 포괄했던 만주 최초의 다종족 통합국가였던 셈이다. 고구려나 발해 이후 만주에서 흥기했던 요(遼), 금(金), 청(淸) 등이 고구려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사는 한국고대사의 범주뿐 아니라 동북아 고대사라는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은 주민의 대다수가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발해사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다만 이 경우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주도했던 주체가 우리 조상이었던 예맥족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계승한 역사체는 한민족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고구려인들이 즐겨먹던 된장과 김치,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켜주던 온돌은 한민족의 삶 속에서만 살아 숨 쉬고 있다. 동그스름하며 바닥이 평평한 고구려 토기는 동글동글한 백제·신라 토기를 밀어내고 한민족 질그릇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처럼 지금 만주는 육로로는 가기 힘든 타국에 속해 있지만, 불과 천 수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고대국가들이 태동하고 고대문화의 표준이 정립되던 한국고대사의 진원지이자 중심지였다. 또한 예맥족 전체를 통합한 고구려나 이를 계승한 발해는 민족사의 근간을 형성하는 한편, 말갈이나 거란 등 다양한 족속과 문화를 포괄하며 제국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만주 그리고 그곳에서 발흥했던 국가체의 성격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고대사라는 범주와 동북아고대사라는 시각을 교차시키며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다음 회는 피터 윤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의 ‘이민족 왕조, 왜 만주에서 나왔을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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