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함석헌을 말하기로 약속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최근에 필자가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한 소년이 목격한 일이다. 경성(京城) 행 기차를 타고 평안북도 정주(定州) 고읍 역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 하나 둘 일어섰다. 소년도 영문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 일어섰다. 어느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한 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얼마 후에 조용히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사람들이 왜 저러는 거예요?”
“저기 오산학교에 계시던 함석헌 선생님이란 분을 생각해서 그런단다.”
“함석헌이란 사람이 누군데요?”
과연 그때 그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른다. 아쉽게도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런데 언젠가 함석헌을 공개 비난한 사람이 바로 그 소년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에게 소년의 기억을 옮겨주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던 어느 원로 목사는 자신이 바로 그 소년의 친구라고 했다. 소년은 나이 일흔이 넘도록 결코 잊을 수 없던 그 장면을 오랜 친구에게 고백한 것이다. 서울과 신의주를 오가던 경의선(京義線) 기차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었던 훌륭한 교육자 함석헌을!
그러나 그때 그 소년처럼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란 필자도 쉽지 않다. 예를 들자면, 우선 사상가 함석헌으로 볼 수 있다. 지난 2008년에 서울대학교에서 주최한 세계철학자대회에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선정되어 그에 관한 많은 논문이 발표된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야민주화운동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하다. 과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재야 민주화운동가의 자취도 굳이 설명 자체가 필요치 않으며, 이 과정에서 1970년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언론인으로 해방 이후 한국 언론계 전체가 한 일보다 더 큰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1979년에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받은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언론 보도가 금지된 인물이자 군사재판에 회부된 중대한 피고인이었으나,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세계평화선언문을 읽고 올림픽위원장 사마란치와 함께 점화를 한 바도 있다. 게다가 종교인과 역사가도 빠뜨릴 수 없는 별칭들이다.
그런 만큼, 비록 기차 안에서 함석헌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던 어린 소년은 아니지만, 필자에게도 소년만큼이나 의문 부호가 따라 붙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의 주제처럼 그가 교육자였다는 것만은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다. 물론 ‘교육자 함석헌’을 말한다는 것 자체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설명은 도리어 어떤 진실을 한정시켜 버릴 테니까.
하기야 필자가 교단에서 20여 년간 남모르게 함석헌을 읽으면서 지내는 동안에도 그 소년처럼 “함석헌이란 사람이 누구예요?”라고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는 참교육이란 말이 동네방네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교육과 참교육을 차별하는 현실의 기형성은 교육과 교육자에 대한 무수한 편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좌우간,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일생을 마친다. 그는 운명 직전에 자기 스승의 뒤를 따르겠다면서 자신의 신체를 학생 실험용으로 오산학교에 바친다. 오산학교는 함석헌 자신이 배우고 가르치던 학교였으며, 그의 스승이란 오산학교 설립자이자 3ㆍ1운동 때 민족대표였던 남강 이승훈을 말한다.
그가 1928년 3월에 처음 부임하던 날, 이 27세의 청년교사는 <성경>을 펼치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읽는다. 교육자를 참다운 목자(牧者)와 동일시한 예사롭지 않던 부임인사였다. 그때부터 함석헌의 일생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든 밖에서든 “선생님”으로 일관하게 된다. 모든 별칭들도 “선생님”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좌우간, 그에게 오산고등보통학교 역사 선생은 스스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다녔다고 말하는 ‘인생의 황금시절’이었으며, 동시에 “교육을 직업으로 아는 가련한 인생”을 거부한 삶의 터전이 닦여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밥벌이 수단으로 선생을 하지는 않겠다는 정신태도(mentality)야말로 그를 길이 남을 “선생님”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동시에 “선생님”의 교훈으로 남기게 된 근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