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어린이놀이시설 2015년까지 설치검사
유·초등학교에서 놀이시설이 사라지고 있다.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 시행으로 2015년까지 전국 유·초등교 놀이시설에 대한 설치검사가 실시되면서 네 건당 한 건의 놀이시설이 불합격 판정을 받고 있지만 교체예산이 없어 줄줄이 폐쇄·철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A교는 지난 주 학교 놀이시설을 모두 철거해 운동장이 황무지가 됐다. 놀이시설 설치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2011년 3월 사용중지 처분이 내려져 줄곧 폐쇄해 오다가 결국 철거하기로 한 것이다. A교 교장은 “시설에 이용금지 푯말과 안전띠를 둘렀지만 아이들의 출입을 일일이 감시할 수도 없고 안전사고라도 발생하면 학교에서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 운영위원회가 철거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인근의 B교도 최근 미끄럼틀, 그네, 늑목 등 모든 놀이시설을 폐기했다. 교육청에 요청해 봐도 “한 두 학교가 아닌 전국적인 현상이라 당장은 도리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놀이기구 문제로 몸살을 앓는 학교는 비단 A교뿐이 아니다. 대전 C교 역시 불합격 받은 일부 시설은 폐기 하고 일부분만 살려 재검사를 받았다. 시설을 하나씩 늘릴 계획이지만 예산 문제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비싼 것은 하나에도 3~4000만원에 달하는 놀이시설을 학교 자체 재정으로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치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대부분 학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발단은 2008년 안전행정부가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을 제정, 2012년 1월 26일까지 전국 모든 어린이 놀이시설의 설치검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한데서 시작됐다. 그러나 전국 6만2000여 개의 놀이시설을 4년 안에 검사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으로 지난 3월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검사 기한을 2015년 1월 26일까지 유예했다. 검사는 안행부가 마련한 시설 및 기술 표준에 따라 진행되며 불합격 판정을 받을 경우 시설은 즉시 폐쇄조치 된다.
지금까지(9월 26일 기준) 전국 1만3251개의 놀이시설 중 합격 시설은 8647개, 부분합격하거나 불합격한 시설은 2121개, 미검사 시설은 2483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총 검사 건수는 1만7808건이고 불합격률은 4490건으로 25.2%다.
<그래픽 참조>
놀이시설들이 불합격 판정을 받는 주된 이유는 외관상 멀쩡해보여도 습기에 약해 안에서는 부식된 경우가 많은 목재기구, 10년 이상 된 녹이 슨 철 구조물, 틈새가 좁아 머리가 끼일 가능성이 있는 늑목 등에서 나타난다.
잇따른 폐쇄 조치에 교원들의 우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산 D교 교사는 “안전검사를 실시하는 것은 아이들이 더 놀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함인데, 설치를 위한 예산도 확보해 놓지 않은 채 기준에 미달하면 폐쇄부터 시키고 대책은 마련해 주지 않는 정부 행태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꼬집었다. 경기 B교 교장도 “지난여름 일본을 방문해 초등학교를 세 군데 돌아보니 우리보다 훨씬 오래된 놀이시설도 여전히 잘 쓰고 있었다”면서 “너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천편일률적인 놀이기구만 설치하다보면 다양하고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통한 창의성 신장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안전관리법은 어린이들이 놀이시설을 안전하게 이용하고 사고 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관리·보호 한다는 취지로 제정됐다. 시설검사업체 관계자는 “놀이기구의 재미와 안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다”면서 “예전에는 사고가 나도 관할구청 등에 담당자가 없어 법적 구제가 힘들었지만 안전검사를 받으면 법이 제시한 가이드라인만 따르면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학교 사정도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시설이 폐쇄된 후다. 대부분의 시·도가 관련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재설치 시기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A교 교장은 “무상급식이나 돌봄교실 등 복지정책에 만 과도하게 예산이 치우치다보니 정작 아이들 교육과 안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교육시설 신축·개보수에 필요한 예산 편성은 소홀한 것 아니냐”며 “진정한 교육복지를 위해서는 기본이 되는 ‘안전’ 먼저 챙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검사 시설의 80% 가까이가 사립유치원인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2015년 1월 이후 모든 설치검사가 끝나면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립유치원의 놀이시설 대부분은 폐쇄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공립과 다르게 예산지원이 힘들어 영세 유치원의 경우 2~3000만원에 달하는 놀이기구를 설치할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고 강요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어린이 놀이시설 보수 및 설치에 대한 예산은 시·도 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기도는 올해 어린이 놀이시설 보수 및 설치비용에 대한 예산이 따로 배정되지 않았지만 내년에는 예산에 설치비용을 포함하도록 할 방침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올해 불합격 받은 놀이시설에 대한 보수 및 설치비용으로 79개교에 16억 원을 지원했다. 학 학교당 2000만 원 정도 지원된 셈이지만 미검사 학교가 유치원 152개교, 초등 97개교인 것을 감안하면 예산증액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교육청 관계자들은 “유예기간인 2015년 1월까지는 설치검사를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추경예산을 통해서라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학생, 교원들은 “언제 복구될지 모르는 채 몇 년 째 애물단지가 된 놀이시설을 바라보기만 하는 현실이 가혹하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