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1년간 '교사'가 된다

2015.08.31 14:12:49

■분당고 이주원 교사의 한국사
20개 단원으로 교과 재구성
모둠별로 수업계획·내용 작성

PPT, 동영상까지 직접 준비
수요 집회 등 체험 활동도
책임·자기주도·사회참여 실천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집회. 분당고 2학년 학생 10여명은 ‘꽃다운 나이에 피지 못한 꽃, 아직도 꽃이 필 봄을 기다립니다’라는 문구를 적은 커다란 현수막을 들고 맨 앞줄에 앉아 일본의 공식적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무대 위로 오른 황도연 군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한국사 시간에 주제사 수업을 했기 때문”이라며 “공부하면서 일제의 만행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가 한일협정 시에 보상이나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으로 안이하게 처리한 것에도 분노했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이날 수요 집회 참석을 위해 일본군'위안부' 역사를 담은 자료집을 비롯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제작하고 발언문을 직접 작성했다.

이주원 교사는 “평소 학생들이 직접 강의를 도맡는 수업방식을 통해 책임감을 갖고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태도를 키워왔던 터라 이번 수요 집회도 학생 주도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교사의 수업은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준비하며 만들어 간다. 수업 중 일부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자를 넘어 수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가 모두 학생이 되는 것. 한국사 교과를 시대·주제에 따라 20여개 단원으로 재구성해 1년간 학생들이 직접 수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2~3명의 학생이 모둠을 구성, 맡은 주제에 대한 수업 계획을 짜서 3월 둘째 주 일요일까지 모두 제출하게 된다. 이때 평가에 대비해 모든 학급이 일정 수준의 지도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교사가 우선 기본적인 수업지도안을 제공하고 학생들이 발표 시나리오를 작성토록 하고 있다. 학생들이 실제 수업을 하기 전까지 보통 3~8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수업안과 강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간다.

학생들에게 수업을 맡기지만 교사가 할 일은 강의식 수업 때보다 몇배나 많다. 이 교사는 “지난해 한국사 수업에서는 1650여 건의 수업지도안을 수정 보완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 교사는 “제가 가르치고자 했던 그 이상을 학생들 스스로 찾아 나가며 공부하고 고민하고, 교과지식을 현재의 삶과 연결시키며 성찰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며 “이 수업을 하면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게 될 정도”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영상감독이 되겠다는 학생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6·25전쟁’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수업하는 등 진로나 성향에 맞춰 다양한 방식의 수업을 도입했다. ‘6·25전쟁’ 수업을 준비하면서 85장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제작하고 16개의 동영상을 준비해 여섯 차시의 수업을 이끌어가는 학생들을 볼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수업 주제도 교과서로 한정되지 않고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일본군'위안부' 수업을 할 때는 베트남 전쟁과 연결해 우리 군의 베트남 국민 학살을 반성하고, 6월 민주항쟁을 배울 때는 지금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의 잠재력을 볼 수 있었다.

이 교사가 수업을 통해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바로 ‘사회적 책임을 통한 인성교육’이다. 학교 교육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배워가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수업을 맡는 것부터 친구, 수업에 대한 책임을 실천하는 행동의 일환이다. 수업에 대해 충실한 준비를 하지 않는 건 친구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학생들은 수업 때 배운 모든 교과의 지식을 동원, 핵심 단어를 뽑아내 개인과 국가, 세계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학기 말에 갖는다. 일본군'위안부' 수요 집회에 참여한 것도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자는 차원에서 실시된 수업 후 활동이다. 학생들은 일본군'위안부'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집회에 참여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뜻이다.

최혜진 양은 “일본군'위안부' 수업을 하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확장되면서 역사를 보는 시각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됐다”며 “일본군'위안부' 집회에 참여하면서 수업이 교실 밖 행동으로 연결돼 매우 뜻 깊었고, 국제변호사라는 제 꿈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교사는 “이같은 수업을 진행하게 된 건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수업을 하는가’라는 수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교직 경력 20년이 돼서야 ‘내가 아이들을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학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좋은 수업을 만들자는 답을 찾아냈고, 역사 교육의 가치는 결국 사회적 책임감을 배우는 데에 있다는 결론을 생각해내면서 구안해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은 학생들이 교과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협력과 소통을 배우고 친구를 배려하고 봉사하는 태도를 얻게 했다. 학생들이 직접 교사가 되면서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도 갖게 됐다.

이 교사는 “인성 교육을 위한 수업에 대한 시류에 휩쓸려 거꾸로 수업, 협력 수업 등에 끌려 다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좋은 수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전공 교과에 대한 교사의 교육 철학을 입혀 교수법을 구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문영 ymy@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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