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같은 선생님', '선생님 같은 학생'

2004.11.25 23:26:00


요즘 아이들 앞에서 웃음을 지어 보인지가 오래된 것 같다. 매번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말없이 성적통계표를 내 앞에 꺼내 놓으면서 얼굴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그나마 성적이 향상된 아이들은 칭찬의 말을 기대라도 하듯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나의 무반응에 그냥 교탁 위에 성적통계표를 올려놓고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두 어깨가 기가 죽은 듯 더 처져 보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맞은 것보다 틀린 것이 더 많은 문제지를 들고 한숨짓는 아이들의 소리가 내 귓전까지 들려온다.

'이게 점수야, 고3이 맞아?'라고 버럭 소리도 질러보고 싶었지만 솔직히 이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은 최선을 다 했으리라'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름대로 위안 아닌 위안을 찾아본다.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작은 눈망울들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아이들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항상 교단에 선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가끔 놀랄 때가 있다.

4월. '아직까지 초반이라 괜찮을 텐데….' 벌써부터 지쳐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모의고사를 치르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것을 보면 교사로서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까지 난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위안을 해 준 적이 거의 없다. 교단에 선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이런 것도 초월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할텐데 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해주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참스승이 아닌가 보다'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성적과 대학진학이 아닐 진데 왜 다들 이것으로 인해서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이 가버린 텅 빈 교실에는 아직까지 아이들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 하다. 마구 버려진 종이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는 교실 책걸상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 어지럽혀져 있다. 항상 보면 마음 아파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왜 이다지도 많은지 모르겠다. 교실 창 밖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간 아이들 얼굴 하나 하나를 그려본다. 특히 작년에 있었던 일은 교사로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입시를 한달 앞둔 어느 날 밤 10시. 이맘때쯤이면 아이들이나 선생님 모두 지쳐있을 때였다. 환하게 불켜진 3학년 교실 복도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아이들에게 위안 아닌 위안을 주기 위해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한 지 7개월.

어떤 때는 내 자신이 교실 문을 여는 것조차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조용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삼일 째 비어 있는 텅 빈자리 세 개였다.

우리 반 아이들 세 명이 가출하여 삼일 째 친구들과 집 그리고 그 누구하고도 연락이 단절된 상태였다. 1학기 때에는 아무 말 없이 학교 생활을 잘해주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입시의 중압감 때문인지 몰라도 며칠 전 책상 위에 '3일 뒤에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짧은 메모 한 장만 남겨놓고 삼일 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으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무척이나 아이들한테 짜증을 많이 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날에 자리 하나가 또 비어있었다. 나중에 그 아이의 친한 친구로부터 안 사실이었지만 그 아이는 가정환경과 성적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해왔다고 하였다. 그것을 견디다 못해 자기 스스로 팔목에 자해를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사실 그 아이는 평소에 말도 없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는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난 항상 자율학습시간에 다른 아이들보다 그 아이의 자리를 더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빈자리에 앉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교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아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 아이의 자해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나와 그 아이의 친한 친구뿐이었다. 나는 불안한 감정을 억제하면서 조용히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다.

"누구 어디 갔지?"

아이들 누구 하나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책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학입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이렇게도 야속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조금 더 큰소리로 다시 한번 더 물어 보았다.

"누구 어디 갔는지 몰라?"

그래도 아이들은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 한번 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모든 아이들에게 책을 모두 덮게 하고 운동장에 집합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참고 있는 것이 표정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운동장에 집합한 아이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마저 나에게는 가식적으로 보여졌다. 이 순간에는 정말이지 교사가 아니기를 바랬는지 모른다. 아이들에게 운동장 다섯 바퀴를 뛰게 하고 계단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별들이 많이 떠 있었다. 교단에 선지 이제 10년째. 수만 개의 분필로도 아직까지 내 이름 석자도 제대로 못쓰는 나다. 지금까지 난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걸까. 항상 이 아이들 앞에만 서면 내 자신이 작아지는 이유는 너무나 지나치게 지식만 강요한 탓인지도 모른다. 진정 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못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은 내가 이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좋은 성적을 얻어 일류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지 친구가 어떻게 되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않는 듯 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긴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저 멀리서 운동장을 뛰고 있는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몇몇 여학생들은 벌써 지친 듯 뒤에 처져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뛰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조금씩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매일 열 한시까지 자율 학습을 하여 지쳐있는 아이들이다. 솔직히 이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잘해준 것도 없는 나다. 힘들어도 내색 한번 제대로 못하는 그런 아이들이 나의 사소한 감정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운동장을 다 돌고 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 모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실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작은 회초리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저희들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있겠습니다."

실장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선생님! 저희들을 때려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잘못을 뉘우치는 이 아이들에게 난 무슨 말로 꾸중을 해야 하나 아니 어떤 말로 위안을 해 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무언가에 의해 내 눈언저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이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지는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제 왔는지 자리를 비웠던 그 아이도 내 다리를 붙잡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다시는 그런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모든 아이들이 앞으로 다가와 나를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내 자신도 북받치는 눈물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의 지나친 감정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아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아이들 하나 둘씩 일으켜 세우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선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아이들 모두가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어도…"

아이들의 노래 소리는 학교 운동장을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청중은 오로지 밤하늘의 별들 뿐 이었지만, 아이들의 합창은 베토벤의 '합창' 그 이상으로 나에게 큰 감명과 인상을 주었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아이들의 합창 소리가 가출한 아이들의 귀에까지 들리기라도 했듯이 가출한 아이들 3명이 내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 있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아이들을 교실로 돌려보냈다.

"이제, 바람에 날려 가지 않도록 머리 속을 무언가로 가득 채워. 그리고 올라가서 바람맞은 곳이 어딘지 자세하게 써 와."

정말이지 아이들은 나를 울리고 웃기는 광대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것을 깨우쳐 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일 때도 있다. 이제 다시는 그 합창을 들을 수 없지만 그 아름다운 선율은 언제나 내 입가에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가끔 힘이 들 때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사랑으로'라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그때 그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학생이자 스승일지도 모른다. 칭찬과 꾸중을 적절히 할 줄 알면 스승이 되고 그걸 제대로 못하면 인생 공부가 더 필요한 학생이 된다.

가장 좋은 스승은 칭찬과 꾸중을 적절히 하는 사람이며, 그런 스승은 학교뿐 아니라 직장, 친구, 선후배, 부모 사이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학생 같은 선생님', '선생님 같은 학생'의 마음으로 영원히 이 교단을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들이 갈수록 퇴색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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