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전화 1통'

2005.02.23 11:05:00

교정에 쌓인 흰 눈이 교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더 하얗게 보인다. 긴 겨울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와 밤 9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는 아이들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꼭 해야만 하는 현실에 불쾌감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자괴감마저 든다.

교실 분위기가 너무나 조용해 산사와 같았다. 그 어느 누구 하나 조는 학생도 없었다. 다만, 책장 넘기는 소리만 아이들의 호흡소리와 함께 들릴 뿐.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자율학습 분위기였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담임인 내가 교실에 있지 않으면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고도 남짓한데 이제 입시를 앞둔 3학년이라 그런지 조금 철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마저 아이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 살펴가며 말 없는 위안을 던져주면서 교실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나의 발걸음 소리까지도 아이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이 정적을 깬 것은 어디에선가 울려나온 단 한 번의 휴대전화기 진동소리였다. 순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그 소리가 난 교실 칠판 앞 부분 쪽이었다. 갑작스런 아이들의 시선에 앞줄에 앉아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은 혹시나 자신의 휴대전화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그 위기를 모면하려는 눈치였다.

아이들 모두에게 눈을 감게 하였다. 그리고 단체 생활에서의 기본예절과 양심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하였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감은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도록 하였다. 잠깐 동안의 휴지가 지났다. 그 어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조금씩 아이들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참을 인(忍)자 하나를 더 새기면서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다시 강조하며 말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손을 들고 자수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아이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아이들 모두에게 주문을 했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운동장에 집합해. 시간은 5분이다."

운동장에 집합을 한 아이들은 추운 듯 눈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그 모습에 화가나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렸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구나."

사실 바람까지 불어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한층 더했다. 그래서 다른 벌을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서 있게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손을 '호호' 불며 내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이 지난 후, 교실로 들어가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구시렁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아이들 중 한 명이 화가 난 듯 볼멘소리를 했다.

"도대체 누구야? 추워죽겠는데"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언 손을 비비며 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런 모습에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휴대전화기가 무엇이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멍들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휴대전화기의 액정모니터 위에 '부재중 전화 1통'이라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전화가 걸려 온 시간이 자율학습의 정적을 깬 바로 그 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 진동소리의 범인은 바로 나. 순간 운동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에 떨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양심을 운운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 사건 이후, 나에게는 이상한 습관 하나가 생겼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꼭 휴대전화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내 마음 한편에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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