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난 뒤, 교정을 거닐면서 지난 날 너와 함께 했던 추억과 인연을 떠올려본단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면서 너에게 못했던 말이 있단다. 입학식 날, 생각 없이 너에게 한 말에 대한 사과(謝過)를 이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못한 것 같구나. 다음 달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앞두고 너에게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사과를 받아줄 수 있겠니?
문득, 재작년 3월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입학식이 끝나고 너희 반에서의 첫 수업이 있던 날, 맨 앞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너에게 생각 없이 '조금 모자란 놈' 이라고 하자 너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물을 훔쳤단다. 수업이 끝난 뒤, 네가 뇌성마비로 행동과 말이 부자연스런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순간적으로 네가 선생님 말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에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단다. 한편으로는 지금 장애로 고생하시는 선생님의 어머님 모습이 간헐적으로 떠올려지더구나.
그 이후로 나는 행동과 말이 부자연스런 너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단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그 일을 잊어버렸는지 우연히 만날 때마다 피하지 않고 웃음을 보여 주더구나. 입학식이후, 모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관심은 너에게 집중되었고, 뇌성마비 장애인인 네가 과연 학교생활을 잘 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단다. 이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학교생활을 잘해주어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한단다.
그런데 며칠 전,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는 애로사항과 아이들의 무관심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葛藤)등을 적은 네 편지를 읽고 난 뒤, 선생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그러고 보니 늘 복도에서 마주칠 때 지어 보였던 그 미소를 요즘 들어 거의 볼 수가 없는 것 같구나. 이제야 네가 매 쉬는 시간마다 내 주변에서 서성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구나. 그렇게 고민이 많은 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지 못하고 매번 야단을 치며 교실로 돌려보낸 것이 후회가 되는구나.
작년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쓴 편지에서 너는 나에게 부담감만 주고 무엇 하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내가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늦었지만 선생님이 갖고 싶은 것 아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너에게는 그 누구도 지어 보일 수 없는 천사의 미소(微笑)가 있단다.
첫 수업 때, 지어 보였던 조금 모자란 듯한 그 바보 같은 미소가 이제는 내가 힘이 들 때 위안을 주는 천사의 미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넌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그런지 네가 슬퍼 보이면 왠지 선생님 마음도 쓸쓸해진단다. 아마도 그건 네가 선생님의 마음 한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탓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단다. 그 천사의 미소를 영원히 잃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서신으로나마 네 편지에 대한 답과 평소에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몇 가지를 해줄 수 있어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한단다.
첫째, 꿈이 있는 네가 되었으면 한단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아예 꿈 그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내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넌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하더구나. 꿈이 있는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한단다. 그냥 할 일없이 주위를 서성거리는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단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같으나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시간의 의미는 다르다고 본단다. 나름대로 계획을 잘 세워 실천해 가는 네가 되었으면 한다.
둘째,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단다.
네 자신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무작정 동정 받기를 원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우리 주위에는 너처럼 육체적인 장애인도 많지만 정신적인 장애인도 많단다. 선생님이 생각하기로는 전자보다 후자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안전불감증(安全不感症)으로 살아가는 요즘 우리도 언제 장애인이 될지 모른단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선천적인 장애보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처럼 후천적인 장애가 더 많다는 사실을 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처럼 말을 하고 행동하는 너를 볼 때마다 무어라 할 말이 없더구나. 지금 네가 처한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단다.
셋째, 가진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너도 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많겠지만 우리 주위에는 너보다 더 심한 중증 장애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지금까지 너는 너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베풀어 본 적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구나. 무작정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베풀 줄 아는 네가 되길 바란다.
끝으로,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단다.
네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단다. 가끔은 선생님의 지나친 관심이 너를 점점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된단다. 가끔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나를 찾아와 넋두리를 늘어놓는 너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망설인 적도 있었단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는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란다.
만약 자신을 이긴다면, 생활해 가면서 그 어떤 어려움이 너에게 닥치더라도 당당하게 해결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너와 함께 한 날보다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아무쪼록 앞으로 남은 학교생활 잘해주길 바라며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는 네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