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쓰는 편지> 할머니의 라디오

2005.05.01 12:59:00

고등학교 1학년 때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시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거의 한달 정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큰댁에서 사시다시피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명의 딸들이 잠든 방문을 여시며 어머니께서는 “할머니 돌아가셨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미리 준비해 두셨던 흰 상복을 안고 큰댁으로 가셨다.

나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보석이다.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보석을 갖게 해 주신 나의 할머니에게 새삼 감사를 드린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반촌에서 자라 마음만 좋으신 할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오셔서 평생 길쌈으로 집안을 꾸리시고 밭떼기를 늘리셨다. 한 동네 200여 미터 안에 할머니가 사시던 큰댁과 우리 집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니보다 활동적이었던 나는 학교를 파하면 집에는 가방만 던져놓고 큰댁으로 갔다.

큰집과 우리 집의 개념조차 없이 큰집을 내 집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후덕하고 순종적이시던 큰어머니와 할머니의 따뜻한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안다. 대지가 300평이 넘는 큰댁에는 살구나무, 감나무, 고욤나무와 함께 안 마당에는 3그루의 앵두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4촌 오빠들이 앵두를 모두 따 먹어 버릴까봐 “토란 밭 위의 앵두나무는 작은집 애들 몫으로 나 두어야한다”고 큰 오빠에게 엄명을 하셨다.

6월초 학교를 파하고 큰댁엘 가면 토란 밭 위의 앵두나무만 살이 오른 앵두가 발갛게 붙어있고, 두개의 앵두나무는 파란 잎만 무성하였다. 누에를 치시던 모습, 할머니가 주신 술 막지 먹고 취한 일, 고추장에 비벼주시던 비듬나물 밥, 그리고 배탈이 나면 배를 쓸어주시며 불러주시던 노랫말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아를 선호하던 시절에도 할머니께서는 큰댁과 달리 딸만 넷 이였던 우리자매들에게 사촌오빠들과 차별둔적도 없었고, 한번도 할머니에게 여자애들에게 하는 일상적인 욕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나에게 할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물건은 너무 많지만 지금 그것들 중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통나무로 만든 두레박, 나막신, 그 많던 길쌈용구들, 큰 통나무 함지박, 대나무 독, 큰 물고기 모양의 청동 자물쇠와 반닫이, 각종 옹기들, 비올 때 머리에 쓰고 다니던 한지로 만들고 기름을 먹인 갓, 겨울 안방을 따듯하게 하던 화로 등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내 할머니의 라디오를 잊을 수 없다.

할머니가 기거하시던 큰댁 안방에는 눈을 뜨시면서 켜시던 커다란 라디오가 있었다. 왕관모양의 별(금성)이 선명하게 찍힌 아주 큰 라디오였다. 이 라디오 등에는 자기 몸만큼 큰 배터리를 메고 항상 안방 할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안방에 라디오와 함께 할머니 손을 떠나지 않던 물건은 담뱃대와 안경집 그리고 할머니의 화투이다. 그 화투는 요즈음 화투와는 만든 방법이 달랐다. 뒷면 종이위에 석회를 바르고 다시 한지를 발라 만들었으며, 그 오랜 세월 한 장도 잃어버리시지도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이 화투는 모퉁이가 달아 둥글어지고 반질거렸다.

생활력이 강하시지 못하셨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18세부터 온 집안 살림을 사셨던 큰 아버지를 할머니는 남편처럼 의지하셨다. 하늘이 내리신 효자시기도 하셨던 큰아버님께서는 공무원이셨고, 매달 월급을 받으면 큰 어머님께 드리지 않고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안방 실겅대 위에 얹힌 작은 반닫이에 그 돈을 받아 넣으셨다. 그리고 큰어머님께서는 항상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그때그때 받으셨고, 그에 대한 불만도 평생 없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큰아버님께서는 1년의 탈상기간을 정하시고 삭(보름)과 망(그믐) 한달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셨다.

어느 날 나는 사랑채에 마련된 할머니의 제사상을 보게 되었다. 그 상위에는 제사음식과 함께 커다란 할머니의 라디오와 화투가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1년의 제사를 끝으로 나는 그 물건들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큰 아버님께서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할머니의 라디오와 같은 형의 라디오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은 그 라디오를 만든 회사의 박물관에서나 그 모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눈을 뜨시면 습관적으로 라디오 소리를 들으셨고 그것은 할머니 삶의 큰 위안이었음을 이제 할 수가 있다. 할머니의 라디오는 마음만 좋고 생활력이 강하지 않으셨던 나의 할아버지에게 시집 오셔서 평생을 자식과 집안을 위해 살면서 많은 것을 속으로 삭히며 사셔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벗 이상의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탈상을 한 후 큰댁은 집을 수리하였다. 그 때 큰댁 다락에서 할머니의 꽃신이 발견되었다. 그 꽃신은 반가의 새색시가 시집을 오면서 신고 온 가죽 꽃신이었다. 아마 시집 온 후 한번도 신어보시지 못하고 계속 다락에만 두셨을 것이다. 그 애틋한 할머니 꽃신조차 지금 내겐 없다. 지금 큰댁에는 지병으로 큰아버님마저 지난해 돌아가시고 후덕하신 나의 큰어머님만 덩그러니 그 집을 지키고 계신다. 명절이 되면 어린 조카들이 강아지와 놀면서 마당을 뛰어다닐 때 난 나막신 신고 뒤뚱거리며 이 마당에서 뛰어놀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 그 마당은 그대로 인데 그 주인공들은 바뀌었고 허리 굽은 내 큰어머니께서는 내 할머니처럼 인자하신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나는 지금도 주말이면 가끔 남편과 아이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할머니에게 배운 몇 가지의 화투 점을 치면서 나의 할머니를 회상하곤 한다.
서인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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