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고통이 따르는 이유*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썪는 길밖에 없다.
*사과*
처음에는 하찮은 작은 돌멩이였던 것이 미룰수록 점점 더 커진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그 사람과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바위가 된다.
-정채봉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중에서-
엄청난 사건으로 온 국민들의 가슴에, 특히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버이와 가족들을 불안하게 하고 침통하게 한 사건. 각종 매체와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갑론을박으로 논쟁을 펼치는 모습을 바람직하게 보고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전통적인 유교 국가였던 이 나라의 역사적 전통으로 보아 정치나 사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익명성을 무기로 욕설이 난무하는 모습까지 포용하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물결을 읽으면 우리 국민들의 성향과 세대간의 차이가 분명하고 지위나 환경에서 오는 뚜렷한 가치관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모든 탓을 정치가에게 책임 전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만 보고 뛰면서 늘 경쟁으로 몰아온 교육을 질타하는 사람, 자기 자식을 기죽지 않게 키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라고 종용해 온 유별난 가정교육 탓이라고 꾸짖는 목소리도 높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므로 당연히 그 책임을 교육에서 찾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뼈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지난 세월, 과밀 학급과 입시 위주의 교육, 양적인 성장으로 세계적인 교육 국가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몇 차례의 국가교육과정의 개정을 거치면서 전인적인 성장과 여러 줄 세우기, 창의성과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교육 정책을 펴 왔음에도 불구하고 초․중등 교육의 귀결점이 대학 교육과 취업으로 이어지는 최종 지점에 다다르면 결국 한 줄 세우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어쩔 수 없는 악순환의 굴레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본다.
최근에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1, 2학년 5명뿐인 복식 학급인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선후배 의식을 목격하고 군대 문화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서로 부딪칠 일이 거의 없어서 아이들의 아름다운 면이 많이 부각되어 꾸지람을 줄 일조차 없었다.
며칠 전, 1학년 받아쓰기 평가를 하려고 공책을 내놓게 하였는데 한 아이가 사물함을 뒤지고 가방을 뒤적여 봐도 공책을 못 찾았다. 집에 가져 간 적이 없다며 울상을 짓기에 다른 공책에 적도록 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받아쓰기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우유를 먹게 하려고 2학년 아이를 심부름 시켰다.
그런데 내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1학년 다른 아이가 2학년 언니가 며칠 전에 친구의 공책을 숨겨 놓았다며 찾아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지도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숨겨놓은 그 자리에 공책을 다시 두게 하고 우유를 먹게 한 다음,
“00야, 00의 받아쓰기 공책을 찾아올래?”
순간 공책을 숨긴 아이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변명부터 했다. 숨겼다가 책상 위에 도로 갖다 주었다고 얼른 대답을 해댔다. 다시 찾아오라고 다그치니 자신도 모르게 숨겨놓은 곳에 가서 쪼르르 찾아온다.
나는 좋은 말로 사과하라고 시켰다. 장난을 한 건데 숨겨 놓고 잊어버렸으니 미안하다고…. 그런데 아이는 사과하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고 미안해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이 아이들과 100일 가까이 담임을 해오면서 얼굴을 붉히며 꾸지람을 한 적이 없어서 최대한 좋은 말로 아무리 타일러도 30분이 넘도록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게 아닌가? 평소의 태도로 보아 영리하고 생각이 깊으니 금방 사과할 줄 알았던 내가 실망하여 목소리가 커지자 아이는 울기 시작하고 1학년 동생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상황을 지혜롭게 넘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며 잘못했을 때는 진심으로 즉각 사과해야 한다는 태도를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었다.
보다 못해 내가 책을 덮고,
“선생님이 00한테 정말 실망했다. 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늘 예뻐하고 기대가 컸는데 이렇게 작은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고집 센 아이인지 몰랐구나. 잘못을 했을 때는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이나 후배라도 당연히 실수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좋은 책도 보고 학교에서 공부도 하는 거란다.
네가 영리해서 아는 것도 많고 성적도 아주 좋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주는 거란다. 네가 공책을 숨겨서 00는 찾느라고 힘들어하고 하마터면 선생님에게도 찬찬히 챙기지 못했다고 야단을 들을 뻔 했잖니?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선생님과 00가 공책을 찾느라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걸 옆에서 보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던 너의 태도는 고쳐야겠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으려면 책가방 다 싸가지고 집에 가거라. 네 잘못은 아주 조그마한 장난이었는데 사과하지 않는 태도는 큰 잘못을 키우는 거야.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고 싶으면 잘 생각해 보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한 내 모습에 녀석은 눈물을 흘리며 1학년 동생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좋은 책도 많이 보고 영리하며 사랑도 많은 아이인데 자신의 고집만 앞세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못하는 태도가 걱정이 되었다.
“00야, 너 보통 때에 동네 친구나 언니, 후배들에게 사과해 본 적 없니? 라고 물으니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름 사람에게, 가족이나 이웃 사람, 친구에게 더 나아가 한 마리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까지도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하는 일이 어찌 없었을까?
에릭 프롬은 사랑도 기술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미안해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태도도 사랑의 초보 기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 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변명을 키우게 하여 다른 사람과의 통로를 막는 바위 구실을 하게 된다.
하나만 낳아 기르는 외동아이들이 많은 현실에 비추어 집에서부터 내 자식만 옳다고 꾸지람하지 않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학교에서조차 아이의 기죽이지 말라고 야단치는 일도 사랑의 매도 거부하는 오늘의 교육 현실이 그대로 나타난 것만 같아 생각 이상으로 잔소리를 많이 하고 말았다.
매를 들진 않았지만 매보다 더 아프게 마음과 생각, 행동을 후려쳐서 미안한 마음에 나도 아이를 껴안고 사과 했다. 학생 수가 적으니 뭐든지 선생님의 관심 안에 있고 자기 집처럼 허물없이 곁에 앉아 어리광부리고 이야기하는 교실 풍경에 익숙했을 아이의 작은 실수를 이처럼 호되게 꾸지람 한 것은 철저하게 각인시켜서 주고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군대에서 생긴 그 엄청난 일의 밑바닥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결합되었다고 보여 진다. 어느 것 한 가지만 빠졌어도 면할 수 있었지 않을까?
군대라는 계급 문화와 폐쇄된 공간에서 오는 대화 부족과 상의 하달식 의사소통의 부재, 자신의 감정을 현명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앙금을 키운 일,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적절한 복지 시설, 차분한 대화보다 욕설이 난무하는 현실이 용납되어 인격 모독으로 이어지는 현실, 어쩌면 사과하거나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상황이 통하지 못하는 군대만의 오랜 관행을 용납해 온 탓이 아닐까 염려 된다. 예전에 비해서 훨씬 나아진 시설과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군대에 보낸 많은 어버이들은 오늘도 좌불안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언어가 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어에도 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즈음의 댓글 문화를 보면 다시금 옛날 학교 교육처럼 고운 말 쓰기 운동이라도 펴야 함을 절감한다.
욕이 먼저인 사람, 육두문자가 아니면 감정 표현이 안 되는 문화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람이 짓는 죄 중에 혀로 짓는 죄가 제일 크다고 했던가? 아무리 좋은 내용의 말이라도 욕이 들어가면 감정부터 상해서 마음이 전해질 수 없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고급 언어이다. 그 고급 언어를 저급하게 사용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게 한다. 욕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는 탓이겠지만, 그 상황이 더 좋아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욕이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데 그 습관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는 데 문제가 있다. 말은 생각의 겉모습이며 고착화 되는 특성까지 갖춘다.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히듯이 욕하는 습관도 자신도 모르게 몸에 달라붙게 되어 중독이 되지 않을까?
이제 다시 교육을 생각한다. 우리말 교육을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실례합니다’를 날마다 외우고 실천했던 수십 년 전 국민학교 교실을 떠올리며 욕하면 되게 혼을 내신 돌아가신 친정아버님을 생각한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니 가정에서,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부터 제대로 된 언어 사용 태도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본을 보이고 가르칠 일이다. 다시는 언어폭력으로 한 사람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기를 기원할 일이다.
다시 교육의 힘으로! ‘미고안실’운동으로 아름다운 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