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자 합격했어요!

2005.11.06 15:39:00


합격자 발표까지는 아직 이틀이 남아있다. 2학기 수시에 5개 대학에 응시했으나 이미 4개 대학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떨어지면 내신이나 수능성적을 고려했을 때 녀석은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루하게 느껴지던 신호음이 끊어지면서 예쁜 교환원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여기 ㅇㅇ고등학교인데요. 합격자를 미리 알 수 있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교환원은 상급자와 의견을 교환한 뒤 합격자 명단만 불러주겠다는 것이다.

재우는 우리반 반장으로 수더분하고 유머 감각이 넘쳐 늘 따르는 친구가 많다. 항상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녀석에게도 그늘진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재우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이었지만. 이후부터 재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키워졌고 그맘때면 겪게되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무수히 겪었으리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에 힘입은 재우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겪는 극심한 반발과 저항심 그리고 일탈행위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무난하게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독거노인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등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이와같은 봉사심은 지난해 치러진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의 영광으로 이어졌고, 올해 1학기까지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2학기에는 우리반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아직 발표까지는 이틀이나 남은 줄 알지만 그래도 먼저 알려주셨으면……"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교환원은 잠시 기다리라며 상급자와 의논하는 듯 했다. 잠시후,

"그러면 선생님, 합격자 명단만 불러 드릴게요"

52명의 지원자 가운데 합격자는 모두 8명이란다. 일곱명까지 부를 때까지 재우의 이름은 없었다. 이번에도 또 탈락했다고 허탈한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교환원의 입에서 마지막 합격자의 이름이 불려졌다. 분명히 재우였다. 그렇게도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합격 소식이었다.

합격자 발표까지는 이틀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재우는 당연히 모르고 있을 터였다. 교무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반으로 달려갔다. 마침 기말고사를 끝내고 아이들 몇몇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재우의 합격 소식을 전하자 아이들 모두가 기뻐하며 일제히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재우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날 아침 교무실에 귀한 손님이 방문하였다. 바로 재우가 모시고 온 할머니와 고모였다. 할머니께서는 손자의 합격이 얼마나 기쁘셨던지 농삿일도 제쳐놓고 딸과 함께 학교를 찾아오신 것이다. 할머니의 손에는 학급 친구들에게 줄 음식물이 잔뜩 들려 있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오히려 죄송스러울 지경이었다.

"선생님 우리 손자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재우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뒷바라지해 준 할머니 공이 가장 크고요."

비록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모르고 자란 재우지만 할머니를 부모님 이상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교실로 모시고 들어가 아이들 앞에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얘들아, 우리 할머니이시다"

할머니께서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던 아이들은 서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할머니도 손자 같은 아이들이 고마웠는지 연신 흐믓한 미소를 흘리고 계셨다. 재우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가지 한 번도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은 우리 반 반장 재우에게 있어 평생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최진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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