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6년을 하루같이 인사를 했다. 꼭 세 분에게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였다.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댁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직장관계로 늘 객지에 나가 계셨다. 물론 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상황이다. 사랑채가 있는 큰 집이지만 우리가 방을 하나 차지하였으니 큰댁으로서는 집이 좁아 불편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우리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셨다.
그 시절 우리에게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학교 시설과 학교 교육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문화의 전부였다. 나는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측백나무가 줄지어선 교문을 들어서던 일이 지금도 선하다. 나는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 사랑으로 자랐다. 그때 잡았던 할아버지 손은 일생동안 나를 염려해주시고 지켜주시는 든든한 손이다. 나를 백 번 천 번 믿어주는 하늘같은 할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인사를 시작했다. '할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할
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큰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또 '할아버지 학교에 다녀
왔습니다.' '할머니 학교에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뺐다. 기억엔 없지만 아마 세 분에게만 하라고 어머니의 귀띔이 있었을 것이다.
남존여비의 한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큰어머니 어머니에겐 인사를 하지 않다가도 모처럼 아버지가 오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나의 인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순이었으며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지 못했을 때는 중요한 일과를 빼먹은 듯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어쩌면 전인권 교수가 저서 '男子의 誕生'에서 지적한대로 큰어머니와 어머니께 인사를 하지 않고 남자어른께만 인사를 한 것이 남자들이 이룩해 놓은 세계의 질서로 편입하기 위한 한 과정이요 훈련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집안 어른께 인사를 함으로써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부정의 결핍을 보상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명의 사촌 형제자매가 한 집에서 자랐는데 유독 나만 6년 동안 꾸준하게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1학년 땐 부반장 2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했으니 내 인사습관이 모범생 의식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범생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일등으로 모범생으로 엘리트 코스만 밟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는 가끔 회의한다. 그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재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난 후 부터였다.
작가는 경기여중,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 독일 유학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이 엘리트 코스가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아이러니를 읽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선자의식(選者意識)'이 그녀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평범하지 않다, 평범해지고 싶다, 나는 평범해질 수 없다는 어떤 강박관념이 있지 않았을까.
각설하고, 왜 그렇게 인사를 했는가. 꼬치꼬치 따져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즐거운 어린 날
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지금도 엉뚱한 경우 엉뚱한 사람에게서 인사를
잘 한다는 칭찬을 듣는 일이 있다. 내가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고등학교 초임교사로 근무하던 때였다. 사십대 후반의 한 고참 선배교사가 최 선생은 인사성이 참 밝다며 칭찬을 하는 거였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말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인사를 잘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가끔 초등학교 적의 생활습관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인사라는 말을 '사람이 해야 할 일'로 풀이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부딪치며 하루를 산다. 가장 적절하게 가장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 기본 예의요,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교육 가족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