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벌써 잊었나요?

2006.04.02 09:13:00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세상이 되니 급식시간에 음식을 남기려는 아이들과 신경전을 펴야한다. 그릇에 밥 한 알이라도 남겼다가는 눈물이 쑥 빠지게 혼이 났던 어른들의 눈에는 요즘 아이들, 음식 귀한 것을 너무 몰라 안타깝기도 하다.

음력 4~5월경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 전 얘기가 아니다. 요즘은 보리밥을 별미로 먹는 세상이고, 섬유질이 풍부한 대신 지방과 탄수화물이 적은 보리개떡이 당뇨병환자들에게나 인기 있는 식품이지만 예전에는 보리가 쌀 다음으로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보리에 식생활에서 부족 되기 쉬운 여러 가지 비타민류, 무기성분,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쌀과 섞어 혼식하면 영양분을 균형적으로 섭취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도시락에 꽁보리밥을 싸오는 아이들도 많았고, 식량정책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강제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혼분식의 날'로 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했을까.

혼·분식 때문에 생긴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그 당시는 점심시간이면 혼식을 하는지 선생님들이 직접 도시락 검사를 했다. 부잣집이나 집에서 귀여움 받는 아이들은 쌀밥 위에 살짝 보리밥을 얹어와 선생님의 눈을 속였고, 눈치 빠른 선생님들은 도시락의 밥을 일일이 숟가락으로 파헤쳐가며 철두철미하게 혼식 여부를 조사했다.

혼식을 하지 않았더라도 학생들이야 벌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식당은 영업정지나 허가취소를 당해 피해가 컸다. 공무원들이 식당을 돌며 혼·분식 여부를 조사해야 할 만큼 식량사정이 암울했는지도 모른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해'

마지막 소절을 '보리밥 먹는 사람 방귀 잘 뀌네'로 바꿔 부르기도 했던 '혼분식의 노래'다. 노래를 만든 이유야 어떻든 '혼분식의 노래'는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자주 부를 만큼 인기도 있었다.

<명사> '식물'. 가을에 씨를 뿌려 초여름에 거두는 주요 농작물의 한 가지. 또는 그 열매. 줄기는 1m쯤으로 곧고 속이 비고 마디가 있으며, 잎은 가늘고 길며 나란히 맥이 있다. 5월쯤에 꽃줄기가 나와 이삭이 생기는데 긴 까끄라기가 있다. <동의어> 대맥(大麥). 모맥(牟麥). 보리를 타다 '매를 맞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

사전에 써있는 대로 보리는 가을에 씨를 뿌린다. 보리는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차디찬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한겨울 바람막이도 없는 논밭에서 푸르름을 자랑해 다른 식물보다 한발 앞서간다는 느낌을 준다. 또 보리밭이나 보리에 관한 그림을 보면 빨갛게 비빈 꽁보리밥이 양푼 가득 들어있고, 잠시 일손을 놓은 농군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새참을 먹던 논두렁이나 밭두렁이 떠오른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의문화재단지내 대청호미술관에서 보리 작가로 유명한 송계(松溪) 박영대(64) 화백의 '보리밭 사잇길로' 전시회에 다녀왔다. 농촌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추상 보리, 맷방석 등 '보리' 가 주제인 50여점의 그림이 선보인 전시회장에서 빈곤과 풍요가 함께 떠올랐다.

풍요를 누릴수록 가난했던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 아울러 요즘 아이들에게 겨울에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보리처럼 희망을 심어주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길러주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낭만을 찾아줘야 한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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