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로 100만평 규모의 공단을 조성하고 있는 곳이 서울에서 61km 떨어진 개성시 봉동리 일원이다. 현대아산 사업소를 나오자 점심을 먹기 위해 건설현장을 차로 가로질러 북측에서 운영하고 있는 식당 봉동관으로 갔다.
주변 환경 때문에 밖에서 보기에는 일반 건설현장에 딸린 근로자들의 식당 같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 안내원들이 특유의 북한 말씨로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붉은 조명아래 테이블마다 미리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멀리 고향에서 온 선후배들을 위해 김기문 사장은 북측에서는 상류층 사람들만이 먹을 수 있는 고급음식까지 준비시켰다. 음식을 먹기 전에 김기문 사장의 모교인 주성중학교 총동문회장님이 감사패도 전달했다.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데도 모두들 북측의 음식이 입맛에 맞는다고 하니 우리는 역시 한민족이었다. 코스요리인지 털게, 평양순대 등 여러 가지 음식이 골고루 나왔다. 음식 앞에서 북측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 남북 경협이라는 생각을 했다.
‘브라보’나 ‘위하여’가 이곳에서는 ‘쭉 냅시다.’였다. 번번이 “쭉 냅시다.”를 외치며 물개가 그려져 있는 령경주를 여러 잔 마셨다. 여자 안내원들은 음식을 나르면서 빈 술잔을 부지런히 채워줬다. 여기저기서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중국에 소재하고 있는 북한식당에서 여자 안내원들의 가무를 볼 수 있듯 봉동관의 여자 안내원들도 앞에 마련된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일행 중 몇 명은 직접 무대에 나가 여자 안내원들과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기도 했고, 대부분은 여자 안내원들의 흥겨운 노래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거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자 안내원들은 예능솜씨만 좋은 게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에 오기가 너무 어려웠던 탓인지 먼 이국에서 동포를 만난 양 사진을 같이 찍자고 이곳저곳에서 ‘여성동무’, ‘여선생’을 불러대도 미소로 다 받아줬다. 하지만 노래 가사에 자주 나오는 ‘동포’, ‘반갑습니다’라는 말이 동질감과 분단의 애환을 그대로 나타냈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공사 차량들이 일으키는 먼지바람 때문에 온통 황토 빛인 공단을 떠나 500년 도읍지였던 개성시내의 모습과 고려유물을 구경하는 개성관광길에 나섰다. 공단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정비가 되지 않아 버스가 덜컹거렸다. 길가로 일반주택과 공동주택, 협동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주민들, 빈터의 그늘아래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북측의 주택이나 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보니 왜 그렇게 지정된 장소 이외 즉 이동중인 차안에서의 촬영을 금지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오십대 초반인 내가 가난으로 고생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을 이곳에서 끄집어냈다.
차안에서 남북협상과 경협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들이 오갔다. 줄 것 다 주면서 북측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너무 감상적으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 그래도 ‘북측에 퍼주기를 하는 것에 불평을 많이 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왕창 퍼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로만손 김기문 사장의 이야기에 대체로 공감을 했다. 북측 주민들의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한 일행들은 한민족의 동질감과 인정 때문에 이구동성으로 측은해했다.
우리보다 여건이 좋았던 독일이 통일되기 전 양국의 소득격차를 해소하느라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개성공단은 남북의 소득격차를 해소시키고, 남북이 어울리면서 평화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서울, 인천과 함께 묶어 동북아 허브지역으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목표가 달성되어 개성이 북한 경제의 중심축이 되길 바랐다.
우리 일행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 개성 시내는 공단에서 10여분 거리였는데 안개가 많이 낀 날씨가 더 회색도시를 만들었다. 시내로 들어서 일행 중 한명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우마차 한대가 지나갔다.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냇물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아낙네들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낡은 베란다에 몇 개씩 있는 화분과 자전거를 타고 이동중인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구호가 많이 써있는 학교와 호미를 들고 작업을 하러 가고 있는 여러 명의 학생들이 관심사였다.
모두가 새로운 풍경이었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생각할 게 없었다. 남측에서는 모두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인데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향해 손까지 흔들며 환영을 해주니 더 정겨웠다. 여유와 가난이라는 낱말을 동시에 떠올리면서 교사인 내가 역사의 현장에 와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임을 실감했다.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개성은 2004년 1월 특급시가 되었다. 1394년(태조 3년)에 처음 지어져 여러 차례 수리했다는 개성 남대문 주변이 가장 번화가라고 했다. 그런데 주민수가 30여만 명인 도시치고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거리가 한산했다. 운행 중인 차량들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로 넘쳐나는 남측 도시와 달리 도시 전체의 활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