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던 급식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6학년 아이들이 급식소에 들어오는 시간이면 늘 있는 일이다. 살아가노라면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먹는 일인데 전교생이 200여명이내인 작은 학교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급식시간의 여유를 빼앗기는 순간이다.
그날따라 식사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의 인상이 더 찌푸려졌다. 전국이 장마 권에 들은 후 며칠째 푹푹 찌는 날씨가 불쾌지수를 높인 탓도 있다. 하지만 1학기 종업식이 며칠 남지 않은 지금까지 급식소가 밥을 먹는 장소인지 장난을 치는 장소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짜증나게 했다.
나도 몇 번 주의를 줬고, 담임선생님이 눈길을 보내고 있는데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마음속으로 ‘몇 놈 때려, 말아’를 고민했다. 꼭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를 실험하는 것 같았다. 도가 지나치는 행동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6학년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지금 여기에 너희들만 있어.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냐. 밥 먹기 싫은 놈들은 당장 나가.”
갑자기 내 눈치를 보며 조용해졌다. 모처럼만에 밥맛이 나는 듯 점심을 먹고 있던 아이들이나 교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일부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체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TV에서 봤다며 교직원들이 때리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들끼리 얘기한다. 그런 얘기를 교직원들 앞에서 은근슬쩍 흘리며 ‘때려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며칠 전에도 공을 차고 있는 6학년 아이들에게 교실로 들어가라는 방송을 했다. 제멋대로해도 된다는 게 습관화된 아이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다. 잘못된 습관일수록 빨리 고쳐줘야 했고, 여러 번 반복된 일이라 뒤늦게까지 공을 찬 아이들의 목덜미를 한대씩 때렸다.
나쁜 것일수록 빨리 전달된다. 순진한 다른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걱정하고 있는 교직원들의 입장에서는 반성할 일이 참 많은 아이들이다. 그런데 반성은커녕 내가 모르게 바로 보건실로 달려갔다. 보건선생님에게 맞아서 아프다는 하소연을 하며 다음에 또 때리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풍요로운 세상이라 아이들의 발육상태가 좋다. 여자 아이들 중에도 몇 명은 연약한 담임(여자)선생님보다 힘이 세다. 몇몇 아이들은 힘을 어른들에게 반항하는데 이용한다.
어떤 날은 다 큰 남여아이들이 앞으로는 서로 안볼 것 마냥 머리채를 잡고 대판 싸우며 난장판을 벌인다. 착한 담임선생님 속 터지게 해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붙어 다니며 깔깔거린다. 도대체 속이 있는 아이들인가 의문이 가지만 저런 게 아이들 세상이라고 무던히 이해를 한다.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역행하는 게 바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권리 찾기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이다. 할 일은 하지 않고 누릴 것만 찾는 사람들이 많다면 불행한 사회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담임의 양해를 얻어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하지 않으려 하고, 줍는 것은 싫어하면서 쓰레기는 아무 곳에나 버리고, 어른들의 얘기 끝에 말대꾸를 하고, 주의 주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웃으면서 건방을 떨고, 서로 남 탓이라고 상대방을 원망하며 짜증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의 생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권리 주장보다 의무이행이 앞서야함을 얘기하며 아이들의 생활도 일부 제한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여자아이 한명은 눈이 충혈 될 정도로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뜻도 없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휩쓸리기도 하는 게 집단생활이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의의 피해자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제 곧 즐거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6학년 아이들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자숙하고 반성하는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면서 미래를 향해 꿈과 희망을 키워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2학기에는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때려, 말아’로 고민하는 일이 없었으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