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행복

2006.08.01 23:13:00

참 오랜만에 신문을 펼쳤다. 재활용으로 내놓기 전에 스크랩을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오랜만에 차분하게 책을 보고 신문을 펼쳐 보는 걸까? 정확히 5개월만에 가져 보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오십견으로 아픈 어깨를 움직여 보려고 아침 산책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책을 볼래, 운동을 할래?" 라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책을 선택할만큼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선 순위가 바뀐 것이다. 이른 잠에서 깨어나 독서 대신에 산책을 나가서 가볍게 몸을 풀지 않으면 안될만큼 나이 앞에서 쩔쩔 매는 내 모습을 이기고 싶었다. 다행히 남편을 따라 옮겨온 이 곳에서는 통근하는 시간을 벌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늘 같이 살 것만 같던 자식들은 각기 자기들의 삶터에서 뿌리를 내리며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결국엔 남편과 나, 둘만 남은 것이다. 부부라기보다 친구라는 표현이 더 맞다고 해야할 것 같다. 혼자였다면 운동을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이른 아침에 일대신에 산책을 나갈 리가 없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아침 시간을 일로 채웠을 터이니...

낯선 땅 강진에 와서 처음 맞는 여름방학이다. 다음 주부터 잡혀 있는 연수 일정을 생각하며 미루어 둔 책읽기에 공을 들여 보지만 해가 다르게 나빠지는 시력과 기억력 감퇴로 속도가 붙지 않아 마음이 상한다. 이어령 박사의 <디지로그>를 읽으며 무디어진 현실 감각을 깨우기로 했다. 그만의 독특한 필치로 해박한 지식을 풀어내어 디지털과 아나로그를 통합한 키워드를 막힘 없이 풀어낸 책이다.

컴퓨터라면 겨우 원고를 쓰거나 디지털 카메라 사진을 올리는 정도로 그치는 수준이라서 뭔가를 더 배워야 한다는 절박함에 골랐던 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 아니라서 끝까지 읽는데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정보화 시대를 산 위에 올라서 조망해 보는 것 같았다. 대단한 석학답게 현란한 수사어를 동원하고 우리 문화에 접목시켜 풀어낸 이어령 박사의 필력에 탄복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차분히 시간을 두고 한 번 더 읽어야 소개할 정도가 될 것 같다.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이었던가! 자유분방한 19명의 아이들 속에서 지쳐가던 1학기였다. 1학년 때에 꼭 정착되어야 할 기본 습관을 앵무새처럼 말하고 행동으로 보이며 아이들과 부대꼈던 109일. 이제는 자동화된 기계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시행착오없이 잘 따라오던 아이들이 한참 예뻐질 무렵,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아쉽게도 아직 글자를 다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있어서 미련이 남지만, 그들도 힘들게 학교 생활을 마치고 쉬고 있을 테니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방학을 하고 난 이틀 후에 걸려온 전화로 마음을 졸였던 순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선생님이세요? 우리 성현이가 방학하는 날 교회에서 캠핑을 간다면서 수영복과 돈을 가져 갔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어요."
"어디로 간 줄도 모르세요? 성현이 할아버지, 너무 걱정 마시고 계세요. 제가 바로 알아 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가! 바닷가 아이들이지만 물놀이 사고로부터 안전하다고 어찌 장담하랴. 성현이는 조부님 슬하에서 자라는 외로운 아이이다. 친구가 많지 않으니 하교 후에도 학교에 남아서 놀기를 좋아하는 명랑한 아이였다. 몇 달만에 만난 동창 모임에 가서 식사를 하다 말고 그 전화를 받고서 나는 입맛조차 잃어버렸었다. 방정맞은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방학이라지만 마음은 아이들 걱정에 한 순간도 휴대폰을 꺼놓지 못하고 산다. 급한 마음에 교회에 다니는 승현이를 찾기로 했다. 승현이 할머니께 여쭈어 보면 알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교회에서 2박3일 캠핑을 가서 돌아오기로 한 날이라고 하셨다. 그 곳에 성현이도 같이 갔다는 말을 전해 드리며 성현이 할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렸다. 노인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급한 마음에 아는 연락처라고는 선생님 전화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연락을 하셨다며 미안해 하신다. 그래도 연락을 알려 드릴 수 있어서 뿌듯하고 안심이 되었던 작은 사건.

아이들과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지금, 그들도 나도 작은 그리움 하나 안고 시간을 보낸다. 부모 곁에서 학교 생활로 묶여 있어서 행복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만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 역시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리고 책으로 보양식을 채우고 부족한 사랑을 다시 채우며 2학기를 살 수 있도록 신선한 배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하게 신문을 스크랩하고 아내 역할을 하며 내가 여자임을 느끼기도 하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도 생각해 보게 되는 방학에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이불을 세탁하고 널어 말리고 겨울 옷들을 갈무리하며 아픈 어깨를 혹사시키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멀리 사는 아들에게도 어미 노릇을 해야 하고 몇 권쯤 책을 더 사서 읽을 생각만 해도 소녀처럼 셀레는 방학.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는 요즈음. 회사일이 바쁘니 휴가 계획조차 잡지 못한 남편이 땀에 젖어 퇴근하면서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있어 발걸음이 빨라진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작은 행복이다. 맞벌이라는 이유로 날마다 힘들어서 축 처진 채 퇴근하는 그를 반갑게 맞아 준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내 자리로 돌아와 아침이면 양말까지 챙겨주는 작은 일에도 그는 행복해 한다.

며칠 뒤면 연수를 받으러 멀리 가서 10일 동안 기숙사 생활까지 들어가니 그 동안이라도 몇 배로 잘 해 주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표현조차 없는 남편에게 미리부터 미안해진다. 방학이라고 남들 다 간다는 해외 여행한 번 같이 못 해 본 우리이다. 부부교사가 아니니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아이들과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지만 알뜰한 남편의 생활 습관이 첫째 이유였다. 아침마다 1시간짜리 산행을 하며 체력을 길러서 장거리 여행 계획을 세워 보려 한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하고 싶다. 신문을 보고 청소를 하고 책을 읽는 행복, 음악을 듣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거는 작은 일들을 사랑한다. 친구들을 만나고 일기를 쓰는 이 작은 일상을 사랑한다.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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