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에 비법은 없다

2006.09.14 10:32:00

전국은 지금 영어열풍에 휩싸여 있다. 물론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영어를 잘 해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젖먹이들을 데려다 학원에 앉히고 영어발음을 좋게 한다면 혀를 늘이는 수술까지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외국에 조기 유학을 시키면 영어 하나는 확실히 습득할 것이라고 여겨 많은 돈을 들여 외국으로 자녀를 내보내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이러한 현상을 기현상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영어공부를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가 국제 언어(International Language)로서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다. 영어를 잘 하면 많은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그래 어학자본이란 말을 쓰지 않는가.

문제는 영어를 습득하기 위한 방법이 매우 비합리적이라는 데 있다. 날마다 매스컴의 광고란을 장식하는 수많은 영어비법에 지금 전 국민이 현혹되어 혼란과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듣기만 하면 귀가 열린다든지, 몇 개월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든지. 중학교 학생이 토익 만점을 맞았다며 비법을 소개하는 책에서 부터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는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의 책이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도 그런 광고를 보고 정말 어떤 비법이 있을 것 같아서 몇 차례 그런 책을 사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책 내용대로 실천하기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저자의 주장대로 그렇게 실력이 향상될 수 있을까 의구심만 남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의 특이한 경험이 대중에게 모두 통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코 영어 학습의 비법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내 나름의 결론을 재확인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나도 중학교 입학과 함께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영어교사로서 30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지만 누가 영어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하고 질문이라도 해오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비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물론 영어공부를 어떻게 하라고 얼른 답변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비법을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우직하게 공부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수많은 광고에 현혹되면 오히려 방향감각만 상실된다. 복잡한 거리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꼴이다. 좋은 책이라며 소개받은 이 책 저 책을 옆에다 잔뜩 쌓아 놓아보자. 세계적 권위자가 펴낸 책이라며 혹은 세계적 명문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책이라 하여 이 것 저 것 각종 테이프를 학생의 책상에 쌓아 놓아보자. 사용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한번 들춰보지도 않은 채 낡아가고 이삼년 후면 쓰레기장으로 직행하게 된다.

학생들이 비효율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선택한 한 권의 책이라도 꼼꼼히 다 끝내야 하는데 많은 문제집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공부하고 있다. 학원을 다니고 해외연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영어 학습에 필수과정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주변 학생들에게서 자극을 받아 공부에 더 전념하게 되거나 학습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학교공부와 스스로의 자습만으로도 의욕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외국어 공부에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한권의 책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마스터 해보자. 단어와 숙어부터 문법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마스터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책은 한결 쉬울 것이다. 학생들은 상당량의 부교재를 산다. 그러나 내 노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데 대충 훑어보고는 그대로 내버린다. 다시 또 새 책을 시작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다. 교사의 진도에 따라 책장이나 넘기다가 그대로 내버리기 일쑤이다.

현대는 대량 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다. 물건들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스스로 올바른 판단조차 할 수 없을 만치 물건이 넘쳐나고 광고가 넘쳐난다. 책도 이윤을 목표로 기업에서 만들어 낸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를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있다. 그 광고에 현혹되어 방향감각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쇼핑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이 책 저 책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우왕좌왕하다가 차분히 공부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영어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곧 기본 어휘와 기본 문법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어습득을 막연한 추상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엉뚱한 곳에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어휘를 익히고 영어식 표현을 익혀야 한다. 너무 어려운 책을 붙들고 씨름 할 것이 아니라 쉬운 책부터 해나가야 한다. 테이프를 통해서라도 원어민 발음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영어공부는 습관이란 말이 그래 타당한 것이다.

백만 원짜리 과외를 한다고 해서 어찌 영어가 저절로 몸에 배겠는가. 외국에 나간다고 해도 귀에 들리는 것은 극히 제한된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수준의 영어 외에는 별 소득이 없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도 독서를 하면서 사전을 찾고 단어를 외우고 듣고 말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수준 있는 영어 습득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국내에서도 고급영어를 습득할 수 있다. 노력 외에 어떤 비법이 있을 리 없다. 배움엔 왕도가 없다(There is no royal road in learning.)고 하지 않는가.

학교 교실에는 학습서들로 넘쳐난다. 한권의 학습서를 완전히 이해하고 다른 학습서를 공부하면 두 번째 학습서는 한결 쉬울 텐데, 한권의 학습서를 대충 답만 대충 맞춰보고는 집어치우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 고등학교 3년 동안 많은 학습서를 공부했으면서도 기초가 없어서 낭패를 보기도 한다. 한권의 문법책 한권의 교과서를 소홀히 하지 말고 정성스럽게 공부한 후에 다른 책을 선택해야 한다. 기본 어휘 기본 문법에 충실할 때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순조롭고 효과도 배가 될 것이다. 많은 교재 많은 학원 수강에 집착하기보다 스스로 나의 공부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혹시 학원이나 출판사의 상업논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차분하게 목표를 가지고 한권의 책부터 시작해보자. 예습 복습으로 어휘를 다지고 여러 번 읽고 기본 문법에 충실하자. 한권을 다 끝 낸 후에 내가 어떤 고지를 정복했다는 뿌듯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고지를 목표로 할 때 훨씬 쉽고 즐겁게 그 고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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