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원의 추억 (10)

2007.01.28 10:00:00

연수원에서 근무할 때 학생 수련활동이 내 업무가 아니고 교원연수가 내 업무였지만 연수원에서 숙소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련활동을 하는 연구사님들과 함께 사감활동에 참여했다. 사감은 너무 힘들다. 일숙직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학여행 때의 지도하시는 선생님보다 더 힘들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학생들을 관리해야 한다. 주변이 산과 바다라 한 학생이라도 이탈하여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수련활동이 끝나고 인원 점검을 마친 후 숙소에 들어가 잠자는 시간이 되어도 곳곳에서는 자지 않고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불을 끄게 하고 자게 해야 한다. 말을 듣지 않는 숙소에 속한 수련생을 불러내어 벌을 주기도 한다. 30분 이상 씨름을 해야만 조용해진다. 그렇게 해서 아침 6시까지 자면 다행이지만 다시 조용하다 싶으면 잠을 자지 않고 떠드는 소리, 장난치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돌아다니며 지도를 한다.

사감은 애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수시로 점검한다. 이렇게 사감은 정신이 없다. 너무 긴장된다. 너무 바쁘다. 하루는 내가 사감이라 아침 6시15분 전에 동편, 서편, 중앙현관의 문을 연 후 6시 시작되는 안내방송 준비를 하는가 하면, 마이크, 스피커, 녹음기를 점검하랴 마음이 바쁘다. 조금도 차질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6시가 되어 행진곡을 각 숙소마다 틀어주고 행진곡이 울리는 가운데 안내방송을 한다. 안내 내용도 각자가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나도 메모를 해서 수련생들에게 방송을 한다.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수련 제3일차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수련생 여러분은 신속한 동작으로 침구를 정돈하고, 운동화를 신고 중앙현관 앞 운동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짧은 만남 속에서 깊은 되새기는 보람된 수련기간이 될 수 있도록 각자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다정스럽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밝아오는 새아침 새 기운을 보면서 마음을 활짝 열어 봅시다. 울울창창 푸른 숲을 보면서 푸른 꿈과 이상을 가져봅시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이렇게 곱지 않은 목소리이지만 나의 안내방송으로 아침 수련을 시작하니 마음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사감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지만 수련생들이 나로 인해 시작되고 움직여지고 있으니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수고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불평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사감을 하는 날 산책을 하게 되면 다가오는 하늘도, 산도, 바다도, 온갖 만물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고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빛날 수밖에 없다. 사감을 하는 4월 어느 날 아침 유달리 날씨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고운 하늘 밑에 바다의 빛깔은 진한 남색으로 물들었고, 햇빛은 찬란하게 빛났다. 새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고, 비둘기는 땅에서 모이를 쪼고 있으며, 잘 보이지 않던 다람쥐도 보였다.

늘어선 소나무 잎은 생동감을 더해 주었고, 벚꽃 속의 자목련은 비록 반쯤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울리는 모양은 화사한 새색시 한복보다 고왔다. 떨어진 꽃의 자리를 푸른 새싹들이 메워주니 더욱 싱싱해 보이고 활기차다.

4월 중순의 날씨답지 않게 바람이 꽤 차가와 얼굴을 간질인다. 벚꽃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사이로 많은 산책객들이 오고간다. 나도 그들 속에 끼어 걸어간다.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좁아진 마음을 넓혀가면서 걷는 동안 내 눈 속에는 한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60대 초반의 아저씨가 중풍을 앓은 듯 지팡이를 짚고 어린 아기가 아장아장 걷듯이 걸어가고 있었고, 그 앞에는 그분의 아내가 그 분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바로 잡으라고 낮은 목소리로 안내해 주고 있는 애틋한 장면이었다.

비록 그 장면은 가슴을 조이는 애달픈 일이지만 그들의 행동 속에는 새 희망과 꿈이 서려 있었다. 새 삶을 창조하려는 그분의 의욕은 숲 사이로 퍼져나는 햇살만큼이나 강렬했고, 남편의 재기를 위해 사랑과 정성을 쏟는 그 지극한 마음은 맑디맑은 푸른 하늘아래 푸르기 그지없는 바다만큼이나 진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식당에서 교수실로 돌아오면서 행복 실은 배를 보게 된다. 그러면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은빛 물결 타고 돛단배 노 저어가니 물새도 덩실대며 구름도 넘실거린다.//바람도 배 실은 몸 마음을 아는 듯, 가벼운 바람으로 서서히 다가오니 파도도 바람 되어 마음을 같이 한다.// 돛단배 몸 실으니 자연이 맞이하네. 해님도 은빛 실어 길 열어 주고, 구름도 반갑다고 길 안내하네. 물새는 친구 되어 길 축복하고, 바람은 동반자 되어 땀 닦아주니, 파도도 동료 되어 짐 들어주네.//큰 배도 동반자 되어 나란히 걸어주니 상심한 나도 길가다 발길을 멈추고 행복 실은 배 위에 눈길을 심는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하고 바다를 보니 바다가 분칠한 엄마 얼굴처럼 다가온다. 그러면 또 노래를 하게 된다.

“알록달록 잿빛 구름 하늘을 수놓고 깨알 같은 빗방울 간간이 내린다.// 울룩불룩 연한 흙빛 바위, 한가로이 혼자 앉아 낚시를 드리우며 몸을 낮춘다.// 한 바다 무대 위 네 척 배 등장하니 하늘도 바다도 조명 비추네.// 작은 두 배(船) 아들 딸 되어 앞서 질러가고, 다른 한 배(船) 막내 되어 뒤에서 따른다.// 큰 배 엄마 되어 그들 품어 안은 듯 발걸음 멈추며 앞 뒤 돌아본다.// 하늘도 바다도 그 모습 아름다워 바삐 움직이며 물감 만든다. 하늘이 회색 내니 바다도 회색 내고 하늘이 검게 내니 바다도 검게 낸다./엄마 품 원이 되어// 앞 뒤 함께 움직이니 하늘도 바다도 원을 그린다./ 검은 목걸이 선물 받아 목에 걸었으니 하얗게 분칠한 엄마 얼굴 같아라.//”
문곤섭 전 울산외국어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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