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깊은 새로운 우리 한시 <손끝에 남은 향기>

2007.03.18 21:01:00


 창으로 비치는 초록의 옷 위에 고운 봄꽃들이 소담하게 피고 있다. 그 소담한 꽃들을 바라보며 잠시 짬을 내어 여러 마음들을 들여다보았다. 옛 사람들의 한시를 맑고 고운 우리말로 풀어놓은 손종섭의 <손끝에 남은 향기>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 그리고 정한의 슬픔과 인생의 무상함 같은 일상의 삶들이 눈앞에 펼쳐지듯 새록새록 다가온다. 또 젊은이의 호기로움과 세상에 대한 해학과 풍자, 삶에 대한 달관의 모습이 가슴을 들뜨게도 하고 힘이 솟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반하고 놀란 것은 한시를 풀어낸 말솜씨였다. 아흔을 바라보는 선생은 실어증에 빠진 한자를 알짬 같은 고운 우리말로 한시를 나긋나긋 풀어냈다는데 그 맛이 달콤하면서도 질리질 않는다. 또 하나 글을 읽다 보면 한시를 풀어놓은 것을 읽는 것인지 예스런 시조를 읽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고 선생의 말을 찾아보니 선생은 한시를 풀어내면서 시조 가락으로 옮겨 놓았다 한다. 한시를 시조의 가락으로 풀어보니 그 예스러운 맛과 우리만이 간직해온 숨결이 다복다복 살아난다며 좋아하는 선생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된다. 허면 맛깔스런 몇 편의 글을 선생의 손길로 풀어낸 말로 살펴보자.

꿀벌은 꽃에 뽀뽀 제비는 흙에 뽀뽀
봄 들자 그지없는 이 아픈 마음일랑
꾀꼬리 시켜 굽이굽이 정을 다해 울게 한다.

봄을 감상한다는 뜻을 지닌 신흠의 '감춘(感春)'이란 한시를 선생은 '꿀벌은 꽃에 뽀뽀'란 제목을 붙여 시조조로 풀어냈는데, 임을 여의고 애타는 화자의 마음을 꿀벌, 제비와 꾀꼬리를 대비시켜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마음이 절로 다가온다. 그러면서 꿀벌과 제비가 꽃과 흙에 뽀뽀한다는 표현엔 동심의 미소가 돌게 한다.

우케 널린 초가집에 탱자꽃 꽃핀 곁에
사립문 닫아놓고 들밥 이고 나간 아낙
쌍쌍이 병아리들은 울 틈으로 나랑들랑….

- 양경우의 '田家(병아리들 나랑들랑)'

탱자꽃 울타리를 한 초가집 마당엔 우케(마당에 멍석 펴고 말리는 곡식)가 널려 있고 아낙은 들밥을 이고 나가면서 병아리가 문밖으로 나갈까 봐 사립문을 닫고 나간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호기심 많은 병아리들은 쌍쌍이 어울리며 울타리 틈으로 나랑들랑하며 세상 구경하기에 바쁘다.

농가의 한가로운 정경을 노래한 이 한시 '전가(田家)'를 표현하는 선생의 우리말에 대한 감각은 신선하면서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특히 병아리들이 울 틈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모습을 표현한 '나랑들랑'은 동심 어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포근한 미소를 돌게 한다.

힘을 다하여 비탈 밭 갈고 나선,
나무에 고삐 매여 외로이 울고 있네.
어쩌면 개갈을 만나 이 억울함 호소할꼬?

- 정내교의 '老牛(고삐 매어 울고 있는 소)'

어느 사회나 사회적 모순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신분제도의 모순으로 평생 낮은 신분을 유지한 채 소처럼 살다간 조선시대의 서민들의 아픔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평생 있는 자들의 부림을 당하고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한 한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이 시 '노우(老牛)'의 화자는 그 억울함을 개갈(소의 말에 능했다는 전설 시대의 개국介國의 임금)에게 호소하고자 하지만 어찌 가능이나 하겠는가.

허면 시대가 좋아졌다는 오늘날에는 이런 억울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을까? 그 형태는 다르겠지만 말하고 싶어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픔이 어디 신분의 아픔만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는 그 아픔은 절절히 말해도 어디 말하여지는가.

반 년을 떠돌던 서울길 나그네가
집이라 돌아오니 회포도 많을시고
베 짜다 맞이해주던 아내 모습 안 보이네.

한스러워라! 모진 고생 함께하던 일
무정도 하여라! 유명을 달리하다니?
한바탕 울고 나니 휑뎅그렁하여라! 늘그막의 신세여!

-신광수의 '還家感賦(집이라 돌아오니)'

부역으로 서울을 떠돌던 낭군이 집이라 돌아와 보니 늘 베를 짜다 낭군을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던 아내가 보이지 않았을 때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평생 모진 고생하면서도 살뜰히 살아왔는데 나그넨 아내의 임종도 보지 못하여 한탄과 서러움에 목메 울어보지만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올 리 없다. 그 허전함이란 '휑뎅그렁함'이다.

우리는 종종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소홀히 대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살뜰한 손 한 번 잡아주거나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 큰 변고가 생긴 다음에 후회하고 한탄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소한 일에도 싸우고 이별하는 요즘 사람들이 한 번쯤 읽으며 생각해 볼만 시(환가감부)를 선생은 아주 멋들어지게 해석하여 표현해 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해학성이 강한 글 하나 보자. 이 시에도 아흔을 바라본다고 생각지 못한 선생의 말 표현이 재미나게 드러나 있다.

아침술에 그물그물 관도 삐뚜름, 책을 펴니 글자들도 삐뚤빼뚤
서당 애들 수군수군 킬킬대는데,
비람람 뜰꽃을 다 망쳐도 내 알 바 아니란다.

- 임유휴의 '絶華(아침술에 근드렁근드렁)'

한시의 제목은 '꽃을 꺾는다'는 '절화'인데 선생은 멋들어지게 '아침술에 근드렁근드렁'이라니 얼마나 신선한 표현인가. 그저 선생의 맛깔스런 표현을 보고 있노라면 만난 음식을 먹는듯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손끝에 남은 향기>. 이 책에는 28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작품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에 설움을 받던 서자나 기생 등이 쓴 시들이 많이 있다. 이는 당시에 설움 받던 계층, 설움에 겨운 목소리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싣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담겨있음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멋은 선생의 맛깔스런 말 표현이다. 그런 선생의 언어에 대해 한학자인 정민 선생의 말을 빌리면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 그리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따라서 이 책을 접한 독자라면 한시를 벗어나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듬뿍 빠져 그 향기를 맛볼 것이다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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