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를 읽다보면 시를 쓴 시인들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다. 봄바람에 밀려오는 향기처럼 소곤소곤 보일 때도 있고, 낯선 들판엔 선 고목처럼, 때론 잡초처럼 아픔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러면서 시인의 글들은 읽는 이에게 다가와 '넌 어때?' 하고 묻기도 한다. 시란 삶이고 인생이기 때문이다.
박정원의 시집 <고드름>에 나오는 시편들에도 이러한 것들이 표출되어 있다. 시인의 전편엔 조금은 무거울 정도로 아픈 삶의 편린과 갈등, 화해와 용서를 찾아나서는 시인의 마음들이 처마의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봄날의 새순처럼 돋아나 있다. 그래서 일면 어렵게 읽혀지는 듯싶으면서도 쉽게 공감을 하기도 한다.
떨어진 이파리 사이를 걷고 있는
개미 한 마리를
쭈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그가 지나가야 할 길에
흙부스러기 한줌 뿌려놓는다
아랑곳없이
흙두덩을 에돌아가는 개미
발이 저려온다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니
또 한 마리의 개미가 나를 내려다보는데
불현듯
그에게 매달리고 싶다
내가 가려는 저쪽 길이
곧아 있더냐
휘어 있더냐
- <개미에게 묻다> 모두
우리네 삶의 길이란 게 미래의 한 지점을 명확하게 해놓고 가는 게 아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길을 가다가도 어느 누군가가 흙부스러기를 뿌려놓아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삶이란 무엇인가? 곧게 가든 에돌아서 가든 멈출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것이 굴곡지든 반듯하든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개미를 바라보다 개미에게 매달리고 싶다고 한다.
스스로의 길을 찾지 못한 자신의 길이 시인은 참담하고 암울했는지 모른다. 허면 왜 시인은 이렇게 시 전편에서 한탄조의 말을 뱉어내고 있을까. 그가 지니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꺾은 장미를 화병에 꽂아놓은 이튿날 저녁
화병 속의 물이 모두 사라졌다
잘라내려는 가위의 힘보다 잘리지 않으려고 버티던 힘이
체면보다도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끈끈함이
여기저기 화병 속 밑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살려고 바동거린 마지막 혈흔이리라
꽃보다 가시 색깔이 더 짙은 것으로 보아
피맺힌 절규는 저리 시뻘겋다 못해 날카롭다
여기기까지 내 길의 끝인가 알기라도 한 듯
목 떨군 향마저 깊다
죽음도 힘이 필요한 걸까
그러쥐었던 꽃대궁 색깔 또한 검붉은데 (……)
- <사라진 힘 >의 앞부분
그의 시편에는 삶에 대한 안간힘, 절규, 그리고 의지가 행간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실 살아감에 어찌 삶의 향긋함만이 있을 수 있을까. 바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 바람 중에는 삶을 송두리째 꺾으려는 바람도 들어있다.
사람들은 그 거세고 야박스런 세상살이 바람에 꺾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하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체념이나 절망보다도 더 집요한 끈끈한 그 무엇으로 말이다. 그러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일단은 모가지 당할 일은 면했다고 / 트럭에 실린 배추처럼 웃으며 / 떨어져 나간 어둠을 잠시 잊는다"('어둠의 맛' 중에서)
시인은 시집을 내면서 첫머리에 '한 줄 내 인생에서 그만 잘라내고 싶었던 지난 5년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어둠 속에 가두어 놓아 잘라내고 싶었을까. 모가지 잘린 배추가 되어 트럭에 실려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도 곧 그 배추처럼 밑이 잘리고 목이 잘려 어디론가 끝없는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나마 어둠을 잊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켰을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모든 것은 물이라고.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린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 <고드름> 모두
시인에게 삶은 송곳처럼 예리하고 단단한 고드름 같은 것이다. 누군가와 싸우기 위해 자신을 냉혹하게 단련시킨다. 그러나 그 단단함 속에 스며드는 햇볕은 송곳의 예리함을 가진 고드름을 물로 만든다. 그러면서 '결국엔 물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럼 물이란 무엇인가. 사랑과 용서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고드름을 만든 것은 물이다. 물이 날카로운 고드름을 만들었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인 물로 돌아온다. 결국 삶이란 이기겠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지겠다고 해서 지는 게 아니다. 억울함에 복수하고자 하나 결국 복수의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옴을 안다. 따라서 고드름이 물이었듯 사랑과 용서도 결국은 하나라는 소리이다.
박정원의 시 전편에 흐르는 물줄기는 '아픔'이다. 절망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미움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진 않지만 사람살이에 대한 상처들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리고 그 속에 용서라는 뿌리를 진한 어둠 속의 등잔불처럼 깜박인다. 그리고 그 안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수반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의 시편들엔 아픔을 바라보며 이겨내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한 바가지 물이 되어 다가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