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왼쪽으로 15도만 돌리면 세 그루의 소나무와 한 그루의 감나무가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난 그 소나무와 감나무를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갖곤 한다.
각기 다른 몸짓으로 서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면 추사의 세한도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의 그림 속엔 그의 쓸쓸하면서도 외로웠던 유배지 제주도에서의 처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듯이 염량세태 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스승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준 제자 이상적의 마음도 가만히 읽어본다.
제자의 정성어린 마음에 스승은 얼마나 고맙고 감격했을까. 제자는 스승의 유배지 생활을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결국 옛 제자의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과 스승의 제자에 대한 고마움이 세한도란 그림을 세상에 나오게 했는지 모른다.
내가 교정에 서있는 소나무를 볼 때마다 추사의 세한도를 생각하게 된 연유는 그림과의 작은 인연이 있기도 해서이다. 13년 전, 난 우연히 고물장수에게서 세한도 그림을 구입했다. 유리가 깨지고 곰팡이가 난 액자를 실고 가는 고물장수의 손수레에서 우연히 그 세한도의 그림을 발견했다. 난 그 고물장수에게 만원을 주며 액자를 구입했다.
고물장수는 그때 5천원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만 원을 주었다. 그림에 대한 나의 마음이랄까. 생각해보면 조금은 치기어린 마음이 있었던 같다. 나의 만원에 고물장수는 웬 횡재냐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 또한 비록 진본은 아니지만 책에서만 보았던 그림을 내 손으로 얻었다는 마음에 기분이 무척 좋아 종일 그림을 보고 또 보고 했었다.
그림을 사서 표구를 하여 깨끗한 모습으로 거실 한 벽면에 걸어두려 했지만 아직까지 표구만 한 채 걸어 두진 못하고 있다. 마땅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을 때 그 의미가 있듯이 그림도 알맞은 자리를 찾아 걸려있을 때 보기가 좋고 의미가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13년 전의 세한도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쪽에 놓인 채 있지만 그림을 꺼내볼 때마다 내 마음은 처음 그림을 얻었을 때만치 차오르고 훈훈해짐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스승과 제자인 추사와 이상적의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음을 볼 수 있어서인지 모른다.
감나무를 바라볼 땐 소나무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소나무의 옆자리에 있지만 감나무는 봄에도 여름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도 감나무는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처연히 서있다. 그러다 4월도 중순을 지나서야 ‘나도 살아 있었다고’ 말하는 듯 아무도 몰래 연한 잎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는 없다.
감나무는 볼품이 별로 없다. 생긴 것도 못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리 단단하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꽃이 예쁜 것도 아니다. 노란 병아리 주둥이처럼 생긴 감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나무는 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서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나무이다. 그것도 붉은 황혼 무렵에서야 말이다.
감나무는 지상의 대부분의 꽃이 질 때 꽃이 피고, 열매 또한 가장 오랫동안 지상에 남아 온전히 타자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 잎이 다 지고 노란 태양 같은 수백 개의 열매 덩어리를 여린 나뭇가지에 매달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겸손해야 할 때 겸손하고, 자신을 드러낼 때가 언제인지를 알게 해준다.
생각해 보면 감나무처럼 인고의 나무도 없는 것 같다. 가장 오랫동안 겨울을 살아가면서도 누구를 시샘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숙명처럼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어찌 보면 현대처럼 ‘빠름’을 강조하는 시대엔 맞지 않은 나무인지도 모른다. 남보다 늦게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걸 보면 감나무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와 어울린다. 느림의 미학의 대표격이라 해도 무방하다 싶다.
늘 변함이 없이 푸름을 유지하며 서있는 소나무, 사시사철 변한듯하면서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켜주는 감나무.
교정의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시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리와 정을 보여주는 추사 김정희와 제자인 이상적의 마음을 생각하는 건 내가 훈장노릇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사라져가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까워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스승이라는 사표가 우리 사회에서 말살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한다. 느린듯하면서도 어떤 겨울의 추위도 이겨내는 감나무를 통해서 삶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지를.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소나무와 감나무, 늘 푸르다고 잘난 체 하지도 않고 못생겼다고 비굴해하지도 않은 두 나무에서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뜨겁고도 말의 바람이 세찬 오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