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들녘에서

2007.06.12 08:40:00


어느 순간부터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고, 미래의 모습을 다듬어 보고 싶었다. 어느 순간이랄 것도 없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부러워지고 부터이다. 제법 나이를 먹고 남보다 많은 세월을 흘러왔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왔다. 뭐랄까. 인생의 정상을 밟지는 않았지만, 이제 정상에서 내려가는 느낌을 가졌다고나 할까.

전에는 머리가 희고 풍기는 인상이 어른스러우면 경외감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위치에 다다르니 뭔가 불안한 느낌이다. 입 밖에 꺼내기는 두려운 면도 있지만, 운이 좋아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의 태풍이라도 오면 여기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아주 신중하게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불뚝불뚝 일어선다.

그동안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을 애써 하지 않았다. 마음을 앞세워 젊은 축에 드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았다. 정상을 향해서 달리기 바빴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삶의 즐거움만 찾아다니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너무 외향에 치중하며 걸어왔다. 남이 어떻게 볼까. 남보다 멋있게 걸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눌렀다. 이제는 내 안의 뜨거움을 느끼며 생활을 해야겠다. 삶의 치열함 속에 내 몸 하나 간추리지 못하고 지내다 보면 후회의 잡초만 무성해 진다. 음미되지 않은 인생의 노를 젓다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게 된다.

나는 사범대학을 졸업하면서 선생이 되고, 지금까지 아이들과 생활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그들의 미래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다. 막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방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은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또 어쩌다 문학에 눈을 떠 글을 쓰면서 스스로 내 마음도 풍요롭게 생활했다.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그런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보다. 주변에서는 내가 선생을 하는 것보다 교감, 교장은 언제 하냐고 궁금해 한다. 나는 선생이 되고 싶어, 선생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알아주는 이웃이 없다. 선생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평가하는 사람도 없고, 오직 내 나이에 얽매여 승진 시기를 묻고 있다.

인생이 허무하게 다가온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올라왔는데, 땀을 흘린 것은 보지 않고 더 올라가야 할 것이 있다며 다그치고 있다. 나의 모습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꽃대가 작다고 폄하하고 있다.

어쩌다가 큰 물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잘못 흘러 곁길로 왔다. 아니 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같지만 나는 큰 물줄기를 따라가지 않고, 의도적으로 여기에 왔다. 그곳이 시끄럽지 않았고, 가슴을 적시는 풍경이 있었다.

핑계 같지만 나는 이제 지쳤다. 힘이 다해서 지친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줄을 서고 경쟁의 꼬리에 서는 것에 지쳤다. 능력도 없는데 바동거리는 일도 할 짓이 아니다.

인생이란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삶이란 개인 모두가 다르고,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섣불리 인생을 이야기하거나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경쟁보다는 새로운 삶의 모습에서 보람을 찾고 싶다. 좀 여유를 갖고, 무거운 것은 버리면서 걸어가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넓은 땅에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인생론을 펼쳐본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햇살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전신을 태우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의 특정한 것만 개량화하는 삶보다,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조차 퇴적물로 쌓이는 들녘에서 살고 싶다.

나는 이 인생론을 쓰면서 ‘삶의 유역에서’라는 제목 앞에서 한참 고민을 했다. 인생은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유역에서’라는 표현이 적절한 듯했다. 그러나 ‘유역’은 흘러간다는 느낌이 짙다. 흘러간다는 것은 목적지에 주체적으로 가는 것보다 휩쓸려 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여행은 반드시 종착역에 다다라야 한다는 중압감이 밀려온다. 반면 ‘들녘’은 삶의 치열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히려 넓은 벌판에서 홀로 바람을 이겨야 하는 시련이 있어 좋다. 햇살에 뜨겁게 달궈지는 가을 열매처럼 성숙한 삶을 익게 하는 매력이 있어 좋다.

나는 들에 핀 꽃처럼 살고 싶다. 이름도 모르고 주목도 받지 않더라도 가을 햇살이 따가우면 열매를 맺고, 계절의 섭리에 몸을 맡기고 싶다. 삶의 울타리에서 화려한 꽃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저만치 혼자서 나만의 줄기와 뿌리로 뻗어 열매를 맺는 소박한 꽃이 되고 싶다.

그 동안은 아름다운 삶을 찾는다고 했지만, 결국은 거짓과 허위가 난무하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들녘에는 햇빛은 햇빛대로, 달빛은 달빛대로 굴절됨이 없이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정직함이 있다. 모두가 자기 몸을 드러내놓고 진실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나는 들녘에서 한가로이 서 있고 싶다. 들녘에 피어나는 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자신이 서 있는 주위와 잘 어울리게 피어난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은 이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 주변에 똑똑한 사람은 많아도 주변을 빛내주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들꽃이 지니는 수수하고 겸허한 자태를 닮고자 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그만 일에 눈을 흘기고 오히려 내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 이제 나를 위해서 웃고 우는 그리고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의 눈을 떠야겠다. 들녘에서 제 몸의 마지막 결실인 씨를 흩날리는 꽃처럼, 물욕을 벗을 수 있는 이름 없는 꽃이 되고 싶다. 들녘에서 햇빛에 맑아지고 자유롭게 오가는 바람의 친구가 되고 싶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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