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6일 저녁 8시. 모 방송국 뉴스를 듣고 있노라니 대리모에 대한 보도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옛 씨받이를 연상할 정도로 현대판 씨받이 대리모는 중국인들이 불법으로 행하는 데 성업 중이라고 한다. 자기의 씨앗으로 자식을 얻겠다는 몸부림인지 아니면 성의 유희를 즐기면서 자식을 얻으려는 것인지 어느 것이 우선인지 그 답은 차라리 독자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육이 우선인지, 학원 교육이 우선인지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고 공부를 해야 할 지는 굳이 학생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다.
배움의 기관 다변화, 학교 교육 대리모 역할로 드러나
교육에 주종 관계를 굳이 교사와 학생이라는 이등분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교육 기관이 공식적으로 학교로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사실은 배움의 주된 터전은 학원이나 과외 교사에 더 의지하고 있다. 만약 학교에서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배움의 터전이라고 하여 학교에 수강을 하겠는가하는 생각조차 든다.
방과후학교를 통해 자신이 부족한 과목을 채워주겠다고 하여도 배움보다는 차라리 자율학습을 하겠다고 하는 학생들도 꽤나 있다.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도 그리고 알아도 교사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학생들의 양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내면에 단순히 청소년기의 반항이라는 의식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학기를 두고 학생들의 마음 자세를 바로 잡는 시기는 3월과 9월로 나눌 수 있다. 1학기를 잘 보내려고 하면 3월 달에 바로잡아 두어야 하고, 2학기를 바르게 보내려고 하면 방학 후 한 달간 학생들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1년간 학생들의 통제는 허수아비 지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자기만의 세상에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 가는 요즘 학생들의 특성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내면에 강한 카리스마를 심어주든지 아니면 그들과 같이 놀아줄 키워드를 찾아내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을 잘 이끌어 가는 것은 우수한 학생들을 잘 길러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업에 관심이 없어서 잠만 자는 학생과 학업보다는 놀기를 좋아해 옆 학생과 수업 시간에도 산만한 학생을 잘 지도하여 교사와 마찰없이 수업이 원만하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사가 고려해야 할 몫이다.
수업 시간에 눈을 똑바로 뜨고 교사를 쳐다보는 학생을 지도하기는 쉽다. 아니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가 관심을 꽤 두지 않아도 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제어해 나간다. 소위 엇나가는 학생을 어떻게 하면 바른 길로 이끌어 손에 손을 맞잡고 나갈까하는 그것이 관건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를 나무라면 오히려 역반응으로 수업에 방해를 하고 자지 않던 잠도 자는 척 하고 수업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이런 학생에게 할 수 있는 길은 더 강하게 지도하여 교사의 위상을 보여주든지 아니면 그들을 다스릴 그 무엇이 있지 않으면 이들을 바르게 이끌어 나가기는 쉽지 않다.
교육의 대리모는 그래도 바른 학교
학교의 올바른 수업은 학원 수업보다는 몇 배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학생들은 진정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학교 교사의 교육이 학원 교사의 교육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마음에 싹트고 있는 무한의 공상을 제어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행동의 시간을 통제해 줌으로써 학업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스럽고 흥미 위주의 수업이 좋다고는 하나 바른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의 교실 수업은 소수 학생을 위한 틀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