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진로 탐색과 부모의 역할

2007.10.29 10:48:00


# 1 (고3 입시 상담실)
“선생님, 제 점수에 맞는 대학은 어디인가요?”
“그래 점수에 맞는 대학보다도 네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무엇인지부터 결정하는 게 좋을 듯한데”
“그렇지만 딱히 무엇을 공부해야 될 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면 어떻게되지 않겠어요”

# 2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선생님, 저 00이 엄마인데 우리 아이 성적을 알 수 있나요”
“지난번에 통지표를 보내드렸는데.., 그럼 다시 말씀드릴게요. 성적이 지난 학기보다 전체적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요. 아니 이 녀석이 어쩌자고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지, 요사이 만화를 그리는 동아리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선생님, 그 녀석 동아리 활동 못 하게 해주세요.”
“글쎄요. 성적도 좋지만 00이가 만화에 취미도 있고 또 재질도 있어 보이는데...”
“아무튼 안돼요. 이 녀석 집에 돌아오기만 해 봐라.”

고3 담임을 맡아 학생들의 진로 상담을 하다보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학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고 그래서 이 학과에 지원하여 장차 어떤 직업을 갖겠다고 분명하게 밝히는 학생이 거의 없다. 그저 대학에만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이 태반이다. 물론 자신의 진로와 장차 자신의 꿈을 펼칠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접하거나 상담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막연하기는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내 자식이 명문대학에만 진학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 게다가 자식의 소질이나 적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장차 직업의 바탕이 될 학과마저도 학부모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향도 다반사다. 남자 아이들은 무조건 법조인, 고급 관료, 의사 등을, 여자 아이들은 교사, 공무원, 은행원 등으로 가이드라인으로 정해두고 자녀들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선 안 될 것처럼 여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학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는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계발보다는 단지 명문대학에 몇 명을 합격시켰느냐를 중시하기 때문에 입시위주로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당장 입시철이 다가오면 고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해당 고교의 교육프로그램보다는 어느 대학에 얼마만큼 합격했느냐를 먼저 따진다. 특히 학업 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의 학부모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하다.

대학입시를 중시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진로교육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교육과정상 ‘진로와 직업’ 교과를 개설하여 시수도 확보하고 학생들에게 교과서도 구입시켰지만 정작 편법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목을 가르칠 교사가 없으니 아예 이 시간에 영어 회화 등 입시 중심의 과목을 운영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진로와 직업’ 과목이 수능이나 대학별 고사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장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의 장래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군다나 전국의 1458개 인문계 고등학교 중에서 41.9%인 611개교는 ‘진로와 직업’ 교과를 아예 선택조차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도록 도와주기 위한 ‘적성검사’나 ‘심리검사’도 형식적인 연례행사로 그치고 있다. 이들 검사를 정확히 분석하여 학생들의 진로에 도움을 줄 담임교사들은 폭주하는 업무에 쫓겨 검사 결과지만 나눠줄 뿐 상담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서 학교마다 이와같은 업무를 전담할 상담교사가 필요하지만 입시과목 중심의 교원수급 계획에 밀려 거론조차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장차 자신이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대상자의 80% 이상은 잘 모른다고 답한다. 답변을 한 학생 가운데서도 막연히 공부하다 보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등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입시교육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진로교육을 제 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는 진로교육을 대하는 인식부터 바꿔놓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가정이다. 즉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자녀들에게 자신이 어떤 소질을 갖고 있고 또 그 재능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지를 도와주는 역할이 부모로부터 나온다는 얘기다. 부모가 자녀의 소질이나 적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성찰해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하는 격이다. 따라서 부모부터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비결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흔들리는나뭇가지와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쉽게 부러진다. 자네들이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싹을 튀워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를 거둘지는 부모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아이가 희망하는 직업이 당장은 부모의 생각과 어긋나더라도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얼마든지 서로가 만족하는 합일점에 이룰 수 있다. “네가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해 줬는데 왜 하필이면 그 직업이냐”라고 다그친다면 아이의 내면에 잠재한 창의성은 싹도 튀워보기 전에 시들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세상을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부모는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앟을 때, “공부 잘하면 네가 좋지 내가 좋냐”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부는 사람이 가진 수 만가지 재능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말에 오히려 반감을 갖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 하느냐의 여부는 적성과 흥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부터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공부보다 그림이나 음악에 재능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나 컴퓨터 세대답게 시스템 설계나 소프트웨어개발 및 응용 등에도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아이들으니 관심사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사교육비는 가히 밑빠진 둑에 물붓기 격이라고 탄식을 하는 교육전문가들이 많다. 부모들이 기대하는 만큼 모든 아이들이 전부 공부를 잘 할 수는 없다. 1등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꼴찌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꼴찌를 하는 아이의 적성은 공부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래서 꼴찌를 하는 아이는 공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잠재능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녀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부모부터 마음을 비우고 내 자식이 어떤 분야에 소질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이를 북돋워 주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부모가 자녀의 소질을 중시하고 이를 통하여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사교육으로 인한 국민적 고통의 해소는 물론이고 입시 위주로 파행을 겪고 있는 공교육의 정상화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일선 학교의 진로 교육이 입시 교육보다 더 활성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최진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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