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의 단상

2009.03.30 08:39:00

어제 밤 소주 한 잔 했더니 토요일 오전 몸이 찌뿌듯하다. 아침밥을 대충 챙겨먹고 근처에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공휴일 오전인데도 붐비진 않는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다. 옷을 벗어 옷장에 넣고 벽에 붙어있는 대형 거울에 몸을 비춰본다. 오른쪽 대퇴부에 커다란 수술자국이 있다. 재작년 12월 자전거를 타다 빙판에 넘어져 골절상을 입어 수술한 흔적이다. 뼈는 다 아물었는데 아직도 핀이 두 개나 박혀 있다. 이삼 개월 후 다시 핀 제거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나는 다시 거울을 보며 내 걸음걸이를 관찰한다. 아무래도 다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걸으며 관찰하지만 아무래도 만족스럽진 않다. 다쳤던 오른 쪽 다리와 왼쪽 다리 사이에 균형이 깨졌나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지만 오히려 자전거로 인해 두 번이나 골절 사고를 당했다. 십여 년 전에 왼쪽 쇄골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던 것이다.

욕실 안으로 들어가 바가지로 물을 퍼 몸에 뿌리고 탕 안으로 들어간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조용히 눈을 감으니 온몸의 피로가 쫙 풀려나가는 것 같다. 나는 편안하게 그 동안 살아온 내 인생을 곰곰이 반추하기도 한다. 고향생각을 하고 학창시절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내 어릴 적 삐뚤빼뚤한 논두렁길이며 냇둑 길, 냇둑 길 한 쪽의 넓은 공터와 그 공터의 노송 몇 그루, 해마다 그넷줄을 매던 수령 수백 년은 족히 될 버드나무가 경지정리를 하면서 다 뽑혀나갔었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고향의 옛 모습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수백 년 수령의 버드나무를 그냥 두고 냇가 공터에 있었던 노송 몇 그루만이라도 보존했더라면 고향마을은 지금쯤 얼마나 운치 있을 것인가. 구불구불한 자연 하천은 일직선 인공하천이 되었고 오랜 세월 함께 사용하던 공동우물은 폐쇄되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렸다. 해마다 단오절이 오면 마을 청년들이 모두 나와 버드나무에 그네 줄을 매던 풍습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물불 안 가리는 경제개발 논리가 오랜 전통과 아름다운 고향 모습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말았다.

10여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와 샤워기가 달려있는 벽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몸에 때를 벗겨내기 시작한다. 나는 오른 쪽 발부터 때를 밀기 시작한다. 비누칠을 안 한 상태에서 발가락, 발가락 사이, 발바닥, 다시 발등, 발목으로 올라가며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다시 왼 쪽을 시작한다. 다시 손과 팔, 몸의 앞부분, 옆구리, 다시 등까지 손이 닿는 부분의 때를 모두 깨끗하게 밀어낸다.

목덜미와 귓바퀴까지 깨끗하게 닦고 샤워로 몸을 헹군 다음 펄펄 끓는 사우나 안으로 들어간다. 사우나 안에서 땀을 흠뻑 흘린 다음 냉탕에 들어가 한동안 몸을 담갔다가 다시 온탕, 앉은뱅이 의자로 돌아와 앉는다. 이제 비누칠을 할 차례. 한동안 나는 환경을 생각해 목욕탕에서도 비누 사용을 자제한 일이 있었다. 요새는 한 번씩 비누칠을 하고 있다. 때밀이 수건에 비누칠을 하여 온몸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으로 목욕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몸의 때를 밀면서 종종 학생들을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직업의식이 이런 데서도 발동되는가보다. 청소년 시절 나는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것이 영 서툴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밀어야 할 지 몰라 손이 팔로 배로 다리로 헤매기 일쑤였다.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때를 밀어내지 못하고 괜히 비누만 잔뜩 묻히고 허둥대다가 목욕탕을 나오곤 했다.

차차 나이를 먹으면서 차분하게 구석구석 때를 미는 요령이 생겼다. 때를 밀면서 생각은 자연히 아이들 공부로 옮겨진다. 공부를 요령 있게 하는 학생들은 세세한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마치 발가락 사이나 귓바퀴 뒷부분까지 골고루 때를 미는 것과 같다. 탕에나 들락거리고 샤워나 해대다가 대충 끝내는 목욕은 별로 신통할 게 없는 법이다. 공부도 그렇게 대충 짚고 넘어가면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다. 구석구석 일일이 손으로 밀고 손이 안 닿는 부분은 수건을 동원해 빈틈없이 밀어내야 뒤끝이 개운하듯 공부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에 중소기업 사장이 목욕을 하면 어떤 생각을 하며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까? 아마 불량률을 어떻게 줄일까 궁리하며 있지는 않을까? 때를 밀면서 소홀하기 쉬운 구석구석을 밀어야 한다는 요령을 터득해가며 작업공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불량률을 줄이고 경쟁력을 갖추게 되리란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장사하는 분은 그 나름대로 성공을 궁리하며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실업자는 구석구석 밀린 때를 열심히 닦아내며 실업 탈출의 현명한 대책을 강구하기도 할 것이다. 혹 연애를 하고 있는 젊은이라면 어떨까? 아마 연애의 성공비법을 생각하며 열심히 때를 밀지도 모를 일이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몸에 있는 물기를 제거하고 저울에 올라서니 탕에 들어가기 전보다 체중이 근 0.8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사우나에서 땀을 뺀 결과다. 아직도 체중을 삼사 킬로를 더 빼야 하는데 벌써 몇 달째 그 상태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오니 삼월 하순 꽃샘바람의 한기가 몸으로 파고든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것 같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극성을 떨어도 한바탕 함성을 내지르려는 꽃봉오리 저 도도한 기세를 어찌 당해내겠는가. 이제 곧 세상은 온통 꽃 천지를 이루고 사람들은 모두 나가 인산인해 상춘인파를 이루리라.
최일화 시인/2011.8 인천남동고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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