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런 곳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들어서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가 풍족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5일마다 장이 열렸다.
'장 보러 간다. 장 구경 간다'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 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경제행위만 이뤄진 게 아니다. 5일장은 세상살이의 축소판이었다. 인정이 살아있던 장터는 옛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힘이 되었다.
장날이면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 중에는 장 구경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장과 장터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면서 경제와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했다. 폭리를 취하거나 거저 빼앗는 게 아니라 의례 흥정을 하며 값을 깎고 덤으로 주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에서 알 수 있듯 장에 대한 기대도 컸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 속에 하나, 둘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5일장들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어 안타깝다. 하긴 대형유통업체들의 24시간 영업으로 지역 상권이 도산하는 마당에 아직 5일 장이 살아있다는 게 경제논리로는 아이러니다.
7월 23일, 옛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이 보고 싶어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경북 상주시 화서면에서 열리는 화령장 구경을 다녀왔다.
화서면은 충북 보은과의 경계지역으로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며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화서IC를 빠져나가면 탱크를 전시한 화령장지구전적비를 만난다. 화령지구는 6.25사변 때는 북한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전적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산악이 천연요새를 이루는 고원지대인데다 동서남북으로 십자대로가 트여 행정, 경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 화령현이 있던 곳이고, 오랫동안 화령고개를 접하며 살아 옛사람들은 화서라는 행정구역명보다 화령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장도 화서장이 아니라 화령장이다.
화령장은 3일과 8일, 화령IC에서 가까운 신봉리 면소재지에서 열린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왔고, 예전 설 대목 장날엔 걷기가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규모가 작은 시골마을의 장터로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집이 장터에서 가깝다는 할머니에게 장꾼생활 30년의 애환을 들었다. 장터 풍경이 해마다 다르단다. 할머니는 손님이 줄어들어 장이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고 나는 장꾼으로 나서야했던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안타까워했다.
화령의 동쪽은 상주, 서쪽은 보은이다. 화령은 지형상 충북의 관기나 보은과 같은 생활권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완행버스에 물건 보따리를 싣고 관기, 보은, 화동, 모동은 물론 추풍령장까지 떠도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사람의 향기를 파는 곳이 5일마다 열리는 시골장이다. 시골장에 가면 한가롭고 여유로운 풍경 속에 살아가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리고 작은 것도 서로 나누는 소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을 주고받던 살가운 장소가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장에서 나와 화령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돌면 500여m 거리에 상현리가 있다. 이곳에 수령이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반송(천연기념물 제293호)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지내는 반송은 높이가 16.5m나 되고 이무기가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하늘로 향한 세 가지의 모양이 탑처럼 생겨 탑송으로도 불리는데 100여 년 전 벼락에 가지 하나를 잃었다. 하지만 이만한 반송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우람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