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늘의 문 활짝 열고 반긴 '백두산' - 1

2009.08.27 13:51:00

수시로 떠나는 여행인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은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혹여 돌발 상황이 여행을 방해할까 8월 10일 새벽 4시 20분경 집을 나섰다. 떠날 때는 늘 즐거운 게 여행이다. 청주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차를 모는 동안 아내와 인생살이를 얘기하며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

길이 막히는 곳이 없어 약속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3층 약속장소에서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달러(USD)와 위안(CNY)을 환전하고 7시 40분경 같이 여행 떠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지루하게 기다렸는데 한교투어 김재훈 가이드를 만나면서 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출국수속을 밟고 면세점을 돌아봤다. 서민들에게는 부담되는 가격이라 눈요기만 하는데 사람을 꼭 빼닮은 마네킹이 아이쇼핑을 즐겁게 한다.

"**님과 @@님, $$로 가는 &&편의 마지막 손님이니 빨리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출발시간 직전까지 탑승하지 않은 손님을 찾는 멘트가 재미있다. 조금 더 너그러우면 급박하게 시간을 다투는 공항에서도 이렇게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9시 40분경 대련(大連)으로 가는 아시아나비행기가 이륙했다. 날씨가 맑아 서해의 작은 섬들이 가깝게 보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우리 국토가 자랑스럽다. 인천에서 대련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15분, 여객선으로 16시간 거리이다. 기내식을 먹고 책 몇 장 읽었는데 같은 모양의 주택이 많은 대련시내가 보인다. 늦는 것을 당연시 하는 나라지만 우리나라의 아시아나항공이라 정시에 도착했다.

맑은 대련의 날씨가 즐거운 여행을 예고한다. 신종인플루엔자 등 각종 전염병 때문에 검역소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입국수속을 밟는 한국여행객들에게 우리말로 '한국전화'를 외치며 검역서에 자택 전화번호를 쓰게 한다.

성해광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최명 현지가이드에게 중국과 대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보다 한 시간 뒤에 가고 있어 중국 사람들은 공짜로 1시간을 더 산다는 얘기가 재미있다. 중국이 차이나가 된 이유도 그럴듯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일어나는 나라,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 통하지 않는 나라가 중국이다. 즉 다른 나라와 차이가 많이 나는 나라다.


대련은 삼면이 바다인 요동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 공업, 관광 도시이다. 인구가 560만 명이나 되고 서울에 버금갈 정도로 생활수준이 높은 중국 동부의 하와이다. 녹화사업이 잘된 산중턱에 지은 건물이 오르막길을 만들어 자전거를 이용하는 다른 도시와 달리 자가용이나 도시버스가 주 교통수단이다.

패션과 맥주축제가 열리는 성해광장은 아시아 최고의 광장이다. 롤러블레이드 연습장을 닮은 조형물 광장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바닷가의 해안선과 도시의 고층빌딩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광장에서 보고 있노라면 이곳의 땅값이 서울의 강남보다 훨씬 비싸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도시의 개방성과 100년 동안 변화한 대련의 역사를 커다란 책을 펼쳐 놓은 모습으로 상징한 조형물과 1세의 어린 아기부터 100세 노인의 발자국까지 100쌍의 발자국을 새긴 길을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비사성 주차장으로 갔다. 비사성이 있는 높이 663m의 대흑산까지는 1인당 3,000원인 봉고차로 이동해야 한다. 먼저 대흑산 중턱의 석고사에 들렸다. 대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사찰의 경치가 아름답다. 사찰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기암절벽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사찰에서 관우를 모시는 것도 특이하다.

고구려 때 축조한 비사성은 대흑산 주위의 석회암으로 쌓은 석성으로 천리장성의 시작점이자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던 최전선이었다.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비사성은 대부분 헐린 채 성벽의 일부만 남아있고 그나마 동북공정과 맞물려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당나라에서 세웠다는 전망대 아래에 옥황상재를 모시고 있어 의아스럽다. 비사성에서 내려와 단동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시내 뒤편 능선으로 등산로가 보이는데 천리장성의 일부분이다.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버스로 4시간 거리다. 고속도로 좌우로 옥수수 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사료와 식용유로 사용하는 옥수수가 중국에서는 고소득 작물이다. 알을 수확하는 방법도 말린 옥수수 두 개를 비비는 수작업이다.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1년 전에 쌓아놓은 옥수수 대도 보인다.

최명 가이드가 전하는 중국 사람들의 생활상도 재미있다. 중국은 전체 인구의 3/4이 농촌에 살고 있다. 땅이 넓은데 비해 인구가 많다보니 모든 농사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사람들의 일거리를 빼앗지 않는 정책을 펼쳐 특별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기계화를 추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토지세 감면, 경작비 보상, 경작비 무이자 대출 등 혜택이 많아져 농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차창 밖 도로변에 묘가 보이지 않는다. 모택동 시절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중요하다는 실용주의를 주장하며 화장을 지시했다. 사망 후 바로 화장해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루며 중국에서 유교가 사라졌다. 하지만 조선족의 장례풍습은 3, 7일장 후 화장한다.

중국에 정착한지 오래 되었지만 식습관, 생활습관이 달라 조선족은 중국인(한족)과 동화되기 어렵다. 고추장과 된장을 좋아하고, 일을 빨리 처리하고, 남자를 우대하는 조선족과 달리 중국인은 기름기를 좋아하고, 행동이 느리고, 여자가 더 우대받는다. 호미질도 조선족은 앉아서 빨리하고 중국인은 서서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한다.

중국의 신랑들은 집과 살림살이 장만은 물론 젖을 먹여 키운 것에 대한 사례로 신부 어머니에게 거금을 지불한다. 결혼 후에도 맞벌이하는 신부를 위해 주방 일은 신랑이 도맡아하고,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부인의 화가 풀릴 때까지 문밖으로 쫓겨난다. 그러니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한국의 드라마를 중국 남자들이 즐겨 시청하고, 조선족 남자와 중국 여자가 결혼하면 대부분 이혼하는 것도 당연하다.


해가 넘어갈 무렵 중국 최대의 변경도시이자 최북단의 연해도시 단동시내에 들어섰다. 45만 인구 중 조선족 5만 명과 북한에서 온 무역상 2만 명이 살고 있는 단동(丹東)은 모든 생활환경이 한국보다 15년 정도 뒤진 곳이지만 해가 뜨는 동방의 붉은 도시답게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현대적 건물이 급속한 발전을 엿보게 한다.

단동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유적들이 많고 북한의 신의주가 압록강 건너편에 있어 한국인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관광명소다. 압록강에는 두 개의 철교 '중조우의교'와 '단교'가 있다. 북한에서 '조중친선다리'로 부르는 '중조우의교'는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이고, 관광지로 개발된 '단교'는 일부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단교는 남북분단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애처롭다. 일제 강점기 만주 진출의 야심을 품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1911년 완공되었고,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막으려고 미군이 B29로 폭격해 북한쪽의 다리가 끊어졌다.


저녁을 먹고 압록강을 다시 돌아봤다. 인구 30만의 신의주나 북한 땅 유화도는 암흑세계인대 비해 단동시내나 5성급 호텔을 짓고 있는 중국 땅 월량도는 불빛으로 화려하다. 길옆의 광장은 부채와 천을 들고 춤을 추거나 태극권을 연마하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열린 공간에서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참여문화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단동은 국경지역이라 몸조심, 돈조심 해야 한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압록강의 야경을 감상하는데 낯선 남자가 단교의 역사를 말해준다며 접근한다. 거들떠보지 않아도 한참동안 내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살핀다.

늦은 시간 숙소인 압록강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짧게나마 여행과정을 정리하고 사진을 편집하다 백두산으로 가는 첫째 날을 마무리했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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