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늘의 문 활짝 열고 반긴 '백두산' - 4

2009.09.05 09:03:00

넷째 날인 13일 아침을 통화에서 맞이했다. 다른 나라와 차이나는 게 많은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는 여정은 그 자체가 고난의 길이다. 일정 내내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 차를 타고, 밤늦게 숙소에 도착해 새벽에 기상하는 게 기본이다. 불현듯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렇게 중국까지 와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통해 큰 땅덩어리를 바른 길로 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직접 확인했다. 처음 만났지만 소소한 것까지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해 늘 흐뭇했다. 남북의 화해무드로 휴전선 넘어 북한 땅을 곧장 내달려 백두산을 만날 날이 가까워졌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이제 차타는데 숙달이 되었다. 아침을 먹자 통화에서 2시간 거리의 집안으로 향한다. 차안에서 가이드가 들려주는 얘기는 현지의 실정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시간 보내는데도 좋다.

중국인들은 붉은색, 복자, 폭죽놀이를 좋아한다. 그런 중국인들이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붉은색 때문에 배앓이를 했다. 붉은색을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운동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응원을 바라봐야만 했다. 더구나 한국 팀이 4강까지 올랐으니 배 많이 아팠을 것이다.

눈만 뜨면 보일만큼 흔한 글자가 복(福)자다. 복이 굴러들어오라는 뜻에서 사람이 많이 출입하는 곳에 복자를 붙인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창고 등에는 복자를 거꾸로 붙인다. 거꾸로 붙인 복자는 하늘에서 복이 굴러 떨어지라는 뜻이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폭죽 값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설날은 조상님 집 잘 찾아오라고, 보름날은 찾아온 귀신들 빨리 나가라고, 개업 날과 결혼식 날에는 붙어있는 귀신 떨어져 나가라고 폭죽을 터뜨린다.

집안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이다. AD 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로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린 만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다. 집안은 고구려 시대의 발자취가 많아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있는 유서 깊은 역사도시다.






집안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 414년 장수왕(사후2년)이 아버지의 재위 22년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반도 최대의 비석 광개토대왕비다. 광개토대왕은 우리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 고구려의 19대 왕이다.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유리비각 속의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3층 건물에 맞먹는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자연석 비신에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한, 중, 일 학자들이 해석한 1,500여자의 비문 중 광개토왕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나온다. 중국에서 호태왕비, 광개토태왕비로 부르는데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 편안하게 민생을 보살핀 하늘과 같이 큰 왕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광개토대왕비는 들판에서 압록강을 바라보고 있다. 1,880년경 청나라사람들에게 발견되었는데 발굴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균열이 와 1,775자 중 122자의 글자가 없어졌다. 고구려의 상징물이자 동아시아 역사 연구의 중요자료인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은 중국에서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침표가 없는 비문은 해석자의 주관에 따라 뜻이 달라져 논란이 되고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유 없이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며 감추는 곳이 많다. 광개토대왕비도 직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한다. 자연석이고, 우리 것인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생각에 셔터를 눌러 사진 세 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광개토대왕의 능은 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거대하지만 예술성이 떨어지고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있다. 피라미드식 광개토대왕릉은 철제 계단으로 올라간다. 모두 도굴 된 후에 발견되어 능의 내부에 큰 직사각형 모양의 받침돌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압록강이 가까이에 있어 능에 오르면 중국과 북한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압록강의 작은 돌들로 계단 안을 채웠고 뒤로 돌아가 봉분 위쪽에서 만나는 편평한 돌이 제단이다. 능에서 보면 춤, 씨름 등의 벽화가 발견된 오호분이 보인다. 이곳이 우산하고분군이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면 장군총 뒤편으로 용산이 보인다. 이곳은 용산하고분군이다.


장수왕릉(장군총)은 거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대정벌사업을 이끈 20대 장수왕릉(장군총)을 묘다. 청나라 말기부터 장군묘처럼 큰 묘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이곳을 장수촌으로 불렀다.




길이가 6m에 가까운 화강암 1,100여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크기에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한 면에 3개씩 기댄 암석 때문에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돌이 내려앉지 않았다. 정면이 국내성이 있던 집안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라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석관의 머리 방향이 북동쪽의 백두산 천지를 향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옆에 있는 첩의 무덤은 아래로 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윗부분에 굽이 있다.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을 '쪼다'라고 한다. 장수왕의 큰 아들이 '조다(助多)'이다.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왕권을 아들에게 넘겨줬다 해서 그를 쪼다로 비하한다. 하지만 장수왕이 19세에 즉위하여 98세에 죽었으니 평균 수명이 짧았던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장수왕을 보필한 공으로 후세에 조다왕으로 불리었으니 쪼다가 아니다.

주차장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 남자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큰 소리로 용서를 구한다. 내용인즉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해 공안이 달려왔고, 중국인들은 공안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된다. 공안이 죄지은 사람 감옥 보내는 것은 예사고 1년에 3,000여명 사형까지 시키면서 땅덩어리 넓고 인구 많은 중국을 통제한다. 뙤약볕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는 중국의 쪼다가 처량해 보였다.




광개토대왕릉에서 바라보이던 오호묘는 왕족의 묘로 추정하는데 이곳에 찬란했던 고구려의 벽화가 있다. 화강석 벽에 그림이 그려진 5개의 고분을 오회분이라 하고 그중 다섯 번째 묘가 바로 고구려 유적의 꽃인 오호묘다. 집안의 고분 벽화 중 유일하게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된다.

피장자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이 있는 묘실에 들어서면 무척 시원하고 실내에 물이 흘러내린다. 동서남북의 네 벽에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 당시의 예술수준을 알게 한다. 돌 위에 직접 그린 36개의 용과 신들을 형상화한 그림이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용한 자연도료가 궁금하다. 인근에 사신도의 사신총, 무용과 생활상의 무용총, 씨름하는 모습의 각저총이 있다. 오호묘는 사진촬영을 금하고 전시실에 다른 고분의 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중국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웃통(윗옷)을 벗고 다니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낮에 웃통 벗고 시내를 활보하면 싸운 줄 안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한 것을 보면 땅덩어리가 커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약발이 먹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나보다.

쾌속보트를 타고 북한의 만포가 가깝게 바라보이는 곳까지 압록강을 유람했다. 이곳에서는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일터로 나오고 일제히 일을 끝내는 어른들, 강가에서 빨래하고 머리감는 일가족,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황소를 흔히 본다. 북한의 식량사정을 말해주듯 중국방향의 산은 나무가 울창한데 북한방향의 산은 높은 곳까지 개간해 밭을 만들었다.

압록강 건너편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높은 굴뚝이 만포의 플라스틱 공장이다. 중국 사람들은 북한쪽에 공장이 들어선 후 압록강이 오염되었다고 했다. 모터보트를 운행하는 중국인은 북한쪽의 초소와 만포를 가리키며 신이 난 모습으로 인민군, 총 공장을 외친다. 슬픈 현실을 망각한 채 20여분 모터보트 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북한식당 묘향산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형이나 화장을 하지 않은 순수미인 북한 여성들이 음식 나르고 공연을 한다. 김치가 맛있어 추가 주문을 하고 김치 국물 한 그릇은 서비스로 요구했다. 중국에서 운영 중인 북한 식당들은 수익금의 1/2을 중국에서 의약품, 학용품 구입비로 지출해야 한다. 동남아 북한 식당의 아가씨들은 공연 후 관광객과 어울려 기념촬영을 하는데 이곳은 국경선이 가까워 사진촬영을 막는다.




집안은 자기 집처럼 편안한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배산임수의 천연요새로 유리왕 때 축조되어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과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만 조금 남아있어 아쉬움이 크다.

국내성 밖 환도산성 입구의 무덤 터에 여러 기의 무덤이 있다.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산봉우리와 주위능선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였다. 현재 약 5m 높이의 화강암 성벽,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 병영과 궁전 터만 남아있고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했을 작은 냇가에 물이 졸졸졸 흐른다.




집안에서 단동까지 5시간 30분 동안 차타는 일이 남아있다. 집안에서 단동으로 가다보면 길림성과 요령성의 경계에 있는 다리를 만난다. 나무로 만든 화장실 풍경과 강가에서 반두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집안에서 이곳까지 73㎞를 달려왔건만 단동까지는 193㎞를 더 가야한다.

지금은 조선족과 중국인이 같이 어울려 산다. 예전 따로 마을을 형성한 채 자주 싸울 때 중국인들은 고려방망이를 뜻하는 꼴리방스(까오리방즈)를 외쳤다. 꼴리방스는 조선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조선족 학교의 교과서는 한국과 북한의 교과서를 이곳의 실정에 맞게 재편집해 사용한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에는 북한에서 만든 교과서로 공부해 남한의 실상을 알 수 없었다. 영화의 배경으로 보이는 남한은 우중충하게 매일 비가 내리고 가난한 사회였다.

시간은 바람과 같이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만큼 차바퀴도 앞으로 굴러간다. 먼 거리라 지루할 줄 알았는데 차창 밖 옥수수 밭을 구경하다 단잠자기를 몇 번 반복했더니 차가 목적지인 단동에 들어선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몸이 차타는데 제대로 적응을 한다.


압록강이 바라보이는 식당에서 마지막 밤을 자축하며 맥주를 마셨다. 함께 참여한 노인분이 장수하길 바라며 건배를 했다. 노인을 모시고 여행 온 자녀들이 일행들에게 감사의 말도 전했다. 친가나 처가에 생존하신 어른이 없는 내가 늘 부러워하는 장면이다.

아침 10시 55분 비행기를 타려면 대련공항에 8시까지 도착해야 한다. 단동에서 대련공항까지는 관광버스로 4시간 거리다. 새벽 4시에 숙소를 출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부지런을 떨기위해 술 한 잔 더 마시고 일찍 잤다.


모닝콜 하기 전에 일어나 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잠잔 시간이 짧아도 피곤하지 않다. 늘 피곤해 하는 아내도 이번 여행은 잘 따라줬다. 숙소를 출발해 압록강을 또 지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을 구분하기 어려운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휴게소에 들렸지만 날씨가 나빠 차안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톨게이트에서 관광버스의 고속도로 요금표를 보니 우리 돈으로 6만원이 넘는 315위안이다. 비싼 요금 때문에 중국의 고속도로가 텅 비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10시 55분에 대련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1시간 15분 후인 오후 1시 10분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정한 일이지만 세상의 이치가 참 재미있다.인천에 도착하며 자연스럽게 중국시간에 1시간이 더해졌다.

잊힐 수 없는 천지의 감동 때문에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문화재가 중국에서 하나, 둘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도 큰 여행이었다. 정부에서 외국의 우리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인천에서 다시 2시간 30분을 달려 청주에 도착해 여행 가방을 풀고 나서야 이번 여행을 마무리 했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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