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단의 일원이 되며...
9월 5일부터 10일까지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다녀왔다. 1988년 11월 중순 서울올림픽의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며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돌아본 지역이었고,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설렘이 가득한 탐방 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답사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던 터라 탐방단 모집에 관한 공문을 보고 주저 없이 지원했다. 내심 기다리고 있다 탐방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탐방 경비부터 입금시킨 후 차근차근 탐방에 관한 준비물을 챙겼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담아오는 것은 물론 잘못된 역사를 똑바로 배워와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해주는 탐방을 계획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사진자료를 많이 담아올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탐방지로...
한민족사 탐방의 일정상으로는 전국의 단원들이 부산영도국제크루즈터미널에 모여 후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출항하면서 시작되지만 마음은 부산으로 가는 우등버스가 오전 9시 30분경 청주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하면서 일본의 탐방지로 향했다.
차안에서 탐방지에 관한 안내책자를 읽다 먼저 출근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하늘빛이 참 좋은 하루입니다. 일본도 그렇겠지요.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직원들이 보내온 문자가 탐방 길을 마냥 즐겁게 했다. 고속버스도 설레는 마음을 알았는지 칠곡휴게소에 들려 커피까지 마셨는데 3시간 만에 범어사와 가까운 부산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은 후 노포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다시 한민족사탐방 셔틀버스에 탑승해 국제여객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오후 2시 40분경 터미널에 도착해 충북에서 탐방에 참여한 13명이 얼굴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 5박 6일 동안 함께 할 가이드들이 탑승차량별로 승선권과 명찰을 나눠주고 탑승과정을 안내했다. 더운 날 좁은 공간에서 시간 때우는 일이 무척 지루했다. 밖으로 나가 낚시하는 사람들과 후지마루호를 카메라에 담고 들어오니 오후 3시 30분경부터 출국 수속이 시작되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만남같이 소중한 게 어디 있으랴. 후지마루호에 올라 탐방기간 동안 419호에서 같이 생활할 서 선생님들을 만났다. 선창가와 출입문 쪽에 나란히 있는 1층 침대와 맞은편 2층 침대의 잠자리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닿소리 순서에 'ㅂ' 다음이 'ㅅ'이라 이뤄진 만남이지만 나이 더 먹은 서성교와 변종만, 나이 조금 적은 서영웅과 서보장은 첫 느낌에 황금콤비였다. 각자 다른 삶을 사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살이를 배우는 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9개 층으로 구성된 초대형 전용여객선 후지마루호를 돌아봤다. 선체길이 167m, 폭 24m, 무게 2만3235톤, 속도 18노트의 후지마루호는 모든 안내가 선내방송으로 이루어진다. 선내에 600명 수용의 대강당, 310석의 식당, 영화관, 라운지, 매점, 목욕탕, 수영장, 의무실, 공중전화, 각종 자판기가 갖춰져 있어 쾌적하고 편리한 여행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내를 돌아보고 눈길 가는대로 부산앞 바다를 구경했다.
뱃전을 서성거리며 일본으로...
오후 5시가 되자 출항을 알리는 선내방송이 나온다. 예인선이 방향을 바꿔주자 덩치가 큰 후지마루호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서히 움직인다. 배로는 처음 떠나는 해외탐방이라 설레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내에게 출항을 알리는 전화를 했다.
뱃전에는 먹빛 바닷물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쐬는 사람들이 많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륙도를 스쳐지나가는 후지마루호 옆으로 갖가지 사연을 가득 담은 배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백제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하던 선각자들도 우리처럼 설렘으로 뱃전을 서성거리며 이곳을 지나갔으리라.
오후 5시 30분부터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한 끼 먹고 나면 선상에서 제공되는 음식이 후지마루호의 자랑거리라는 말을 이해한다.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맛에 맞춘 고추, 마늘, 상추, 된장을 식사 때마다 무한정 제공한다. 일본 사람들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 돋보인다.
식사 후 대강당에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 이문준 차장이 '후지마루호에 교사 289명ㆍ일반인 189명ㆍ본부직원 49명ㆍ승무원 134명이 타고 있으며, 삼성의료진에서 식사시간 전후 이동의무실을 운영하고. 일본 배인 후지마루호에 오르는 순간부터 일본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배로 이동하는 항로와 관광버스로 이동하는 육로의 총거리가 2,000여㎞에 달한다'는 한민족사 탐방과 후지마루호에 관한 안내사항을 전달했다.
이어 단상에 올라온 일본인 의사는 신종플루가 독감보다 경미한 질병이지만 최선을 다해 예방하겠다는 말로 탐방단의 불안감을 줄여줬고, 선내 책임자는 '만나서 반갑습니다ㆍ걱정마십시오ㆍ꽈당ㆍ한국말은 여기까지' 등 우리말을 재미있게 섞어가며 탐방단원들을 즐겁게 했다.
피날레를 장식한 선상대학 '우리문화의 일본전파'는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원로인 정영호 교수님이 한민족사 탐방과 관련이 깊은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수한 입담으로 설명하는 알찬시간이었다.
이날 정 교수님은 육지, 바다, 하늘이 모두 공원지역이라 4,000톤 이상 배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한민족사 탐방 단원들이 대마도에 들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대마도에 있는 우리 문화를 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정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대마도에 들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대마도(쓰시마)는 태종대에서 48.5㎞ 거리라 지리적으로 우리에게는 가까운 곳이고 일본에게는 먼 곳이다. 우리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는 관문이라 여러 번 정벌을 시도했다. 유배당해 죽은 면암 최익현과 한문을 일본에 처음 전래한 왕인박사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조선통신사가 거쳐 가던 곳으로 1703년 배가 좌초하여 사망한 조선 역관사(통역관) 108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비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가 있다. 우리의 불상 124점 등 우리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고 여연(우나쓰라)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여인들이 잡혀온 곳으로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옹주묘가 있다. 농토가 없는 지역이라 김해평야 하류 사람들의 발바닥이 나온 이다스께 유적지의 볍씨가 발견되지 않는다.'
정 교수님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대한해협, 이키섬까지는 일본해협, 큐슈까지는 현해탄이라며 국내에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의 동종 두 개만 존재하는 신라종이 일본에 6개나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또 불에 탄 것을 옛날과 비슷한 수준으로 복원해 보존하고 있는 법륭사의 벽화는 시대적으로 담징이 그렸다고 볼 수 없어 무조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며 백제나 신라의 문화가 대한해협을 건너와 하카다, 오사카, 교토, 나라 등지로 전파되었다는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상대학이 11시가 넘어 끝났지만 첫 만남에 첫날밤인데 어떻게 그냥 보내겠는가? 일행들과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나누면서 자기 지역의 학교 실정을 얘기했다. 다른 시도에 사는 교사들이 같은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을 생각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하카다에 입항해 한민족사 탐방을 시작하며...
"한민족사 탐방에 참여하신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9월 6일 아침 해가 밝았습니다. 지금 후지마루호가 위치한 곳은 하카다항 외항입니다.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A조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하카다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깜빡이는 도시의 불빛이 가깝게 보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턱을 괸 채 사색하고, 갑판 위를 뛰며 일본에서의 첫 아침을 진지하게 맞이하고 있다. 그림솜씨가 없는지라 선상에 앉아 항구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아침을 먹은 후 8시부터 후지마루호에서 하선해 입국심사를 했다. 나라 사이에도 힘이 없는 국민은 괄시받는다. 여기저기 한글 안내판이 눈에 띄고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친절하게 대해 우리 국력의 힘을 실감한다. 처음만난 관광버스 기사들이 차에 오를 때까지 일사분란하게 교통안내를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입국심사 시 지문과 얼굴 사진을 찍어 기분이 언짢았다.
일본 열도 중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 하카다만이다. 부산과는 200㎞인데 비해 도쿄와는 300㎞나 되는 거리를 보더라도 규슈(큐슈)는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지는 루트였다. 하카다항은 규슈(九州)에서 가장 큰 도시 후쿠오카에 있다. 탐방자료에 의하면 인구 134만여 명의 후쿠오카는 일찍부터 한반도, 중국, 동남아와 교류하던 관문으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카가와 강 동쪽의 상인 도시 하카다, 서쪽의 무사 도시 후쿠오카가 하나의 후쿠오카로 합병되었지만 아직 하카다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후가 따뜻해 아름다운 바다경치를 즐기기에 좋고 하카타돈타쿠 개항축제와 하카타 인형이 유명하다.
하카다항에서 한반도를 향한 전진기지 대재부(다자이후)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주택과 좁은 골목길, 55년만에 정권을 바꾼 선거벽보 등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대재부(大宰府)는 일본인들이 멸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일본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8세기 초 이전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아스카 도성을 떠나 규슈로 나오던 열도의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병을 얻어 아사쿠라궁에서 사망(661년)한다. 그의 아들 나카노오오에노는 하카다 연안에 전진기지를 구축한 채 두 번에 걸쳐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금강하구 백촌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규슈로 되돌아온다.
나카노오오에노는 하카다만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고 백제유민들의 선진기술을 이용해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쌓으며 신라가 규슈까지 쳐들어올 것에 대비했다. 이때 만들어진 수성은 주위가 모두 산으로 막혀있는 지형을 이용했고, 산성인 오노성은 백촌강 전투 패전 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귀족들의 지도로 665년에 축성되었다.
대재부 가기 전 오른편에 해자를 물로 채워 성을 지키던 수성의 표석이 서있다. 표석 뒤편으로 수성이 1.2㎞나 남아있지만 울창하게 산림이 우거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9시 10분경 수성에서 가까운 대재부 터에 도착해 손승철 교수님의 문화해설을 들었다. 이번 탐방지는 모두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로 우리와 관계가 밀접했던 지역이다. 손 교수님은 일본문화의 특성을 신사문화, 고분문화, 절문화, 성문화로 구분하며 한민족사 탐방은 일본역사속의 우리 문화를 돌아보는 시공간의 역사여행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대재부는 크게 다스리는 관청으로 일본의 행정과 외교의 중심역할은 물론 외래 문물을 들여오는 창구였다. 정무를 보던 대재부 터를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주변에 큼지막한 주춧돌이 규칙적으로 놓여있다. 백제식의 이 주춧돌들이 당시 건축물의 규모를 알게 한다. 대재부 터에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 오노성이 보이고 가까운 곳에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9시 50분경 1시간 거리인 구마모토로 가는 길목의 후나야마 고분으로 향했다. 대나무와 소나무 숲 속에 있다 1873년 토지 주인이 꼭대기를 파보라는 꿈을 꾸고 발굴했다는 이 고분은 중요 유물이 100여 점이나 나온 전방후원분이다.
전방후원분은 앞부분에 제사 같은 의식이 치러졌을 네모반듯한 기단을 마련하고 뒷부분에 둥근 봉분을 축조하여 매장하는 고분이다. 일본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정방후원분의 문화적 수준이 낮다며 문화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영호 교수님은 '아무리 지역이 넓어도 통상 2년 이내에 보고서를 내는 게 학계의 관례인데 이렇게 대단한 발굴을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거치느라 오랫동안 보고서를 내지 않은 게 의심스럽다며 백제식인 석관의 맞배형 뚜껑을 비롯해 금동관, 금동신발, 철검 등 무령왕릉이나 익산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닮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고분 아래에 토지 주인이 살던 큰 농가주택과 물레방아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주택에서 신당과 불당을 보고나면 일본을 왜 종교천국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도쿄박물관에 있고 모형전시관에는 모조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방후원분과 가까운 곳에 동물을 닮은 비석들이 서있어 이채롭다. 11시 50분까지 후나야마 고분을 둘러보고 아소산을 관람하기 위해 떠났다.
가는 길에 제법 규모가 큰 사찰 오지원 옆 식당에서 일식도시락을 먹었다. 1엔이 모자라도 물건을 살 수 없을 만큼 에누리와 덤이 없는 사회가 일본이다. 가이드는 단무지 한 개라도 더 먹은 만큼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하고, 서너 개 쯤 덤으로 줄 수 있는 사회라야 사람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자판기 천국이다.
아소산까지 도로변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져 눈이 즐겁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삼나무 군락지가 많아 현무암으로 이뤄진 아소산의 분화구와 주변의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규슈의 얼굴인 아소산은 세계최대의 분화구(칼데라)를 가진 불의 나라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이다. 둘레 4km, 깊이 100m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하늘로 내뿜는 분연이 끓는 물에서 나오는 하얀 수증기를 닮았다. 분연을 뿜어내는 웅대한 산을 배경으로 풀밭이 천리나 펼쳐진다는 쿠사센리(草千里)가 펼쳐진다. 소와 말의 무리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대여한 말을 타고 여유를 누리는 관광객들이 많다. 제주도의 한라산을 연상시키는 이곳이 겨울에는 인공스키장으로 변신을 한다.
시간에 쫓겨 200만 년 전의 대폭발부터 수많은 폭발과 분화는 물론 아소화산의 현재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화산박물관 입구에서 사진만 담은 채 발길을 돌린 게 아쉽다.
쿠사센리에서 벳부까지는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큼 고갯길이 길게 이어진다. 같은 차를 타고 탐방을 하는 일행들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차안에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조경이 잘된 나라답게 길가의 가로수들이 인상적이다. 오이타현의 벳부가 가까워지자 먼 산과 굴뚝에서 김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벳부는 동경 인근의 아타미와 함께 일본 최고의 온천지대이고, 서민들이 적은 돈으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전통 온천마을 유후인과 가깝다. 온천물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수증기 부뚜막에서 달걀을 삶고 여러 가지 음식을 요리한다. 인구 13만이 사는 곳에 대욕탕이 100개가 넘고 마을의 작은 목욕탕도 모두 온천물일 만큼 시내 곳곳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유황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벳부는 화약의 원료로 쓰이는 유황 때문에 왕래가 더 많았던 곳이다. 앞은 바다, 뒤는 산으로 둘러싸인 온천지대에서 매년 4월 초 온천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일본의 생활필수품인 다다미방에서 잠을 자며 여름위주인 일본의 주택 구조와 부엌과 온돌방 등 겨울위주인 한국의 주택 구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4박은 후지마루호 선상에서, 1박은 벳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기노이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탐방 일정이 짜여있다. 주위가 어둠으로 물드는 시간에 도착했지만 최고급 호텔답게 직원들이 밖에까지 나와 탐방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식사도 숙성시킨 갈치회 등 진수성찬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행지에서는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경험하는 게 최고다. 가이드가 외출하는 것을 꺼렸지만 식사 후 같은 방 일행들과 호텔에서 나와 해변 쪽을 향해 걸었다. 소형차에 맞게 그려진 주차선과 클랙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서 일본 사람들의 검소함과 배려심이 보였다. 큰 마트에 들어가 물건 값을 알아보니 자판기보다 훨씬 저렴하다. 호텔방에서 마실 맥주를 싼값에 사니 괜히 기분이 좋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호텔로 향하는 일행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방 식구들 모두 유카타로 갈아입고 본관 6층의 대온천장 다나유로 갔다. 이천여 명이 묵는 호텔의 온천이라 사람들로 붐볐지만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풀렸다. 몸을 씻고, 뼈를 씻고, 마음까지 씻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각자 유카타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경험한 일이나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2시가 넘었다. 나이 더 먹었다고 대우받으며 다다미방에서 꿈나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