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으로 선린우호관계 이어가야 -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4

2009.10.05 11:03:00

오사카 성에는 아직도 풍신수길의 야욕이...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탐방대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 시간은 오전 6시입니다. 밖의 날씨는 무척 맑습니다. 오늘은 6시 30분에 14호차부터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침잠을 깨우는 선내방송마저 정겹게 들렸다. 선상에서 자고, 씻고, 먹는 일이 일상처럼 느껴지는데 탐방은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탐방 닷새째인 9월 9일이다.

오전 9시 10분경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일관계를 적대국으로 만든 도요토미가 자신의 거처로 만든 오사카성으로 향했다. 인구 260만의 오사카는 한반도의 대륙문화가 들어온 관문이자 일본 제1의 상업도시다. 일찍부터 수로와 운하가 발달한 이곳에 오사카성이 있다.


오사카성의 박물관 앞에서 손승철 교수님의 문화해설이 있었다. 이날 손 교수님은 여러 가지를 얘기 하셨는데 2천년 전의 일본과 그 당시 일본 문화의 뿌리였던 한국의 모습, 2009년의 일본과 한국의 모습을 비교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월등히 높은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셨다.

'사무라이는 귀인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 섬기는 자를 뜻한다. 무사들은 중앙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호한 대가로 교토, 오사카 등 노른자위 땅을 하사받으며 중앙으로 진출했다. 천황은 상징적인 자리이고 무사정권이 실세가 되는 막부시대가 열리는 시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 100여 년 동안의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등의 무사가 등장했고 이들은 자신의 본거지에 성을 쌓았다.'

'오사카성은 1583년부터 절터에 성을 쌓기 시작해 1년 6개월만에 본채만 완공한 채 15년 동안 건축했다. 천수각의 5층 누각 전체를 금과 은으로 도금해 화려했지만 침략의 야욕을 키우던 도요토미가 죽은 뒤 폐허로 변했다. 3대 쇼군시절 각 지역 영주들에게 공사를 할당해 복원한 후에도 세 번의 벼락이 천수각을 불태웠다. 영주들의 충성심 경쟁으로 각 지역에서 크고 잘생긴 돌만 옮겨와 성을 복원했지만 1931년 완공한 지금의 천수각은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원형이 많이 훼손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실패했다.'

'일본의 성들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 물이 채워진 해자가 있고, 성문이 뚫려도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3번 꺾어서 들어오는 구조다. 한국의 성은 산에 쌓은 산성과 도시에 쌓은 읍성인데 일본의 성은 평지에 쌓은 평성이다. 군인들만 사는 평성과 달리 군인과 백성들이 같이 살던 읍성이나 산성은 전쟁이 나면 인명피해가 컸다. 임진왜란 때 진주읍성에서만 7만 명이 죽는 등 200여만 명이 희생당했다.'

일본의 3대 장군은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자결한 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국력만 소모하고 질병으로 사망한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대망의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막부시대를 탄생시킨 도쿠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두고 세 장군이 했다는 말이 재미있다. '오다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려라.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하라.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결국 평화주의자인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최후의 승자가 된 것에 인생살이의 의미가 있다. 적장이지만 도쿠가와의 삶이 너그럽고 여유로웠기에 수도를 에도(도쿄)로 옮기고 일본의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했다.


도요토미가 살아보지도 못했다는 천수각은 웅장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도요토미 개인의 역사박물관 위주로 꾸며져 있다. 왜군들이 입던 전투복 등 옛 전시물에 풍신수길의 야욕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오사카성 공원을 나와 오전 10시 40분경 차가 신사이바시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해 오전 11시 30분부터 신사이밧과 면세점을 돌아봤다. 신사이바시는 오사카 최대의 쇼핑가로 각종 백화점과 아케이드 거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아케이드 거리를 걷는데 '창업 명치 2년'이 써 있는 상호가 보인다. 140년 동안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가게주인의 생활자세가 부럽다.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아이들에게 줄 모자 두 개와 아내에게 줄 소형 라디오를 샀다.


오후 1시 10분경 후지마루호가 정박하고 있는 부둣가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단체복과 단체모를 쓴 유치원생들이 보인다. 놀이공원에 현장학습 나온 꼬마들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모두 귀엽다.


배에 오르기 전 일행들과 어제 들렸던 마트로 향했다. 맥주, 안주 등 저녁 간식거리를 사고 부둣가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제일 낮다는 천보산을 구경했다. 서너 걸음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4.5m의 낮은 산이지만 주변에서 천보산(天保山) 지명을 많이 볼 수 있어 도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산이었음을 증명한다. 후지마루호의 승무원들은 마지막까지 신종인플루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배에 오를 때는 공항과 같이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오늘은 여권을 들고 입국심사대까지 거쳐야 했다.

한 번에 300명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지만 600여 명의 탐방단을 2조로 나누다보니 오후 2시가 넘어 식당으로 갔다. 그래도 탐방단원들은 하나같이 고추, 마늘, 상추, 된장, 김치, 깍두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후지마루호의 식단을 칭찬한다.

늦은 식사 탓인지 여정을 뒤돌아보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눈꺼풀 이기는 장사 없다'고 선미의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단잠을 자는데 '잠시 후 부두에서 환송식이 열린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통로를 가득 메운 탐방객들에게 오색테이프를 나누어줬다. 부둣가에는 멋진 제복을 입은 브라스밴드가 등장하고 14대의 관광버스 기사들이 일렬로 줄을 맞춘 채 서 있었다.

올드랭사인에 감사의 눈물이...

오후 3시 50분경 식이 시작되고 버스기사들이 '다시 만납시다. 감사합니다'가 써 있는 종이를 펼쳐들었다. 일본의 관광버스 기사와 인근 건물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탐방단원들이 일제히 오색테이프를 던졌다. 장관을 이룬 테이프 사이로 기사들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이고 밴드들이 춤을 추며 '올드랭사인'을 들려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현재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환송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감사의 눈물이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야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네/ 잘 가시오 잘 있으오 축배를 든 손에 석별의 정 잊지 못해 눈물만 흘리네 이 자리를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고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배가 부둣가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탐방단원들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일렬로 늘어선 기사들이 부산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 후지마루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관광버스 기사들은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손님 모두에게 계단조심을 안내하고 미리 손님을 하차시킨 기사들은 하나같이 다른 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본이나 우리나 서로 적대시 할 게 아니라 조선통신사가 드나들던 예전과 같이 선린우호를 다지며 친근한 이웃으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 4시 20분경 후지마루호가 정박했던 부둣가 주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쳐 지나가는 바다풍경을 바라보다 선실에 들어와 맥주 한잔 먹고 있는데 현수교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세토대교가 가깝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또 밖으로 나가 셔터를 눌러댔다. 본인이 즐겨 하는 일이지만 사진 찍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세가 고되다. 오후 5시 40분경 후지마루호가 세토대교를 지나고도 한참을 뱃전에 있다 들어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오후부터는 배 안에서만 지내는데다 점심 먹은 것을 소화시킬 시간도 없다.

시같이 아름다운 인생을 계획하며...

마음이 즐거우면 몸의 피로가 풀린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된 선상대학은 그걸 증명해줬다. 정호승 시인은 노래로 만들어진 본인의 시를 들려주며 일상생활이 시의 둥지이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정호승 시인의 감성과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표가 있다. 이것저것, 여기저기 글을 쓰면서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언제인 줄 모르지만 아이들에 관한 사랑이 예전만 못하면 내 글을 쓰는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정호승 시인은 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비타민이었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이날 정호승 시인이 육성으로 들려준 '햇살에게'와 '수선화'는 인생살이를 뒤돌아보게 했다. 시를 마음 속으로 되뇌며 감사함에 인색했던 그동안의 삶을 반성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행복을 키우며 즐거워하는 인생살이를 계획했다.

가수 윤짱이 선상대학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윤짱은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관객들을 사로잡는 가창력을 지녔다. 탐방단원 모두가 같이 박수치고 엉덩이를 흔들며 하나가 되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선상대학이 끝났다. 선실에서 맥주를 마시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7층의 선미로 갔다. 한민족사 탐방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는 팀들이 여럿이었다. 우리도 부산 팀들 옆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정을 주고 받았다.

자판기의 맥주가 품절이다. 하지만 419호에는 영웅호걸 선생님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영웅답게 다른 일행의 여직원이 선물로 구입한 양주를 구해왔다. 양주를 깨끗이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9월 10일, 탐방 마지막 날이다. 다른 날보다 늦게 일어나 뱃전으로 나갔다. 탐방 없이 배에서만 생활하는 날이라 모든 게 여유롭다. 뱃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느리다. 


구쥬와 혼슈를 잇는 다리가 나타나자 연세가 드신 어른들은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을 오가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얘기부터 했다.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한과 눈물이 고여 있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엄마, 춥지 않으세요?" "응, 괜찮다." 뱃전에서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하도 정겨워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했다.

긴 바다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오전 9시부터 3회 연속 영화상영이 이어졌다. 그중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며 가슴을 울리는 실화영화 <더 노트북>과 전직 특수 요원 출신의 아버지가 파리 여행 중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리얼하게 추격전을 펼치는 <테이큰>을 감상했다.

탐방단원들의 숙박을 편안하게 해줬던 후지마루호에서 하선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사물함을 열고 부피가 줄어든 짐을 정리했다. 선상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30분부터는 한 곳에 모여 커피타임을 가졌다. 윤짱의 노래를 조용히 듣고 있던 오후 3시 20분경 해운대가 보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니 멀리 해운대의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우리나라 해역을 달린 지 한참 되었건만 부산이 보이자 모두들 설레는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떠날 때 눈도장을 찍었던 오륙도가 그 자리에서 반겼다.

5박 6일 동안 같이 생활한 서 선생님 3분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오후 4시 20분경 하선을 하고 입국수속을 밟았다. 충북 교육청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다시 청주로 달렸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자기 집이다. 몸이 피곤했지만 집식구들을 만날 생각에 눈이 말똥말똥했다. 차 안에서 조선왕조 5백년사를 읽다보니 청주에 도착했다.

탐방을 마무리하며...

우리 반 아이들이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재미 있었느냐고 물어왔다. 물론 바쁜 일정이었지만 재미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우리 문화를 찾아보는 역사탐방이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과거의 어두웠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한일 양국의 인적교류가 계속 늘어나는데 '가깝고도 먼' 관계로만 지낼 수도 없다.

점점 멀어지며 희미하게 사라졌던 부산앞바다가 크게 다가왔듯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도 가까워지면 크게 보이고 멀어지면 작게 보이는 사물의 이치와 다를 게 없다.

한국과 일본은 선의의 경쟁을 하되 이웃사촌으로 가깝게 지내야 한다. 예전처럼 선린우호 관계를 이어가야 양국의 미래가 밝다. 양국의 젊은이들이 손을 마주잡고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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