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한과 오랜 역사 간직한 '공주'

2010.02.21 20:21:00

백제의 옛 도읍지 공주는 인구 13만여 명의 작은 도시다. 1월 31일, 청주삼백리 회원 40여 명이 청주에서 1시간 거리의 공주로 답사를 다녀왔다.

공산성 주차장에서 문화관광해설사 최병옥님을 만났다. 우리의 일정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공부하러 온 알짜배기 답사팀을 만났다는 최병옥님과 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우금치로 가는 차안에서 최병옥님이 공주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지역이었고, 마한지역에는 가장 크고 번성했던 목지국을 비롯해 봉건제 국가가 54개나 되었으며, 백제시대에는 지명이 곰과 나루를 뜻하는 웅진(熊津)으로 한글로 쓰면 곰나루였고, 단군신화처럼 곰과 관련된 곰(고마)나루 전설이 전해져온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옛날 강 건너 연미산으로 나무하러 갔던 나무꾼이 여자로 변신한 암곰을 따라 굴속으로 들어갔다. 곰은 나무꾼에게 좋은 음식을 주며 보살폈지만 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놓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세월이 흘러 자식이 두 명이나 되자 안심한 곰은 굴 입구를 돌로 막지 않고 사냥을 나갔다. 굴을 빠져나온 나무꾼이 헤엄쳐 강 건너편에 도착한 것을 뒤늦게 알고 곰은 돌아올 것을 애원했으나 나무꾼이 들어주지 않자 두 자식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때부터 배가 이곳을 지날 때면 풍랑이 일고 변고가 생기자 곰사당을 지어 곰의 영혼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 박세리 조형물
공주사람들이 웅진을 소개할 때면 공주의 쓰리 박으로 불리는 골프의 박세리, 야구의 박찬호, 판소리의 박동진 만큼이나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님의 얘기를 빼놓지 않는다. 이날 최병옥님도 윤석금 회장님에 대해 자랑했다. 공주의 옛 지명을 사용하는 웅진그룹이 우리나라 10대 그룹 중 하나로 성장해 고향발전에 앞장서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차가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룬 우금치전적지(牛禁峙戰蹟地)에 도착했다. 공주의 남쪽에 위치한 우금치는 옛날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던 고개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최대, 최후의 격전지였다. 우금치의 동학혁명군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하며 두 번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생각해봤다.

최병옥님의 해설에 네이버와 야후의 백과사전에 소개된 내용을 덧붙이면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수세는 물론 조상 묘를 만드는 명목 등으로 수탈을 일삼았고, 아랫사람들마저 농민들을 괴롭히며 정부의 직책을 팔아먹는 세상이 된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이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 말과 이듬해 초 2회에 걸쳐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나아지지 않자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나아간다. 이에 놀란 조병갑은 줄행랑쳤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준 후 신임 군수 박원명의 무마책에 해산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건처리를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안핵사 이용태가 관련자들을 동학도로 취급하며 역적으로 몰아 탄압하자 분개한 농민들은 서장옥의 제자였던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과 손화중을 장령으로 추대하고 봉기한다. 이것이 1차 동학농민운동이다.

갑오농민운동은 전라도 전역과 충청도로 확대되었고,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한다. 수차례 전주성을 공격하며 희생자가 많아지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하고, 청나라의 군사파견은 일본군 개입의 빌미가 된다. 당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한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며 농민군에게 해산을 종용했다. 전주성 싸움의 피해와 청나라 군사의 상륙 소식으로 두려움이 커진 농민군도 보리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라 귀향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은 각종 개혁과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내용이 담긴 27개조의 폐정개혁안으로 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일종의 민정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며 농민군을 해산한다.

하지만 휴전이 동학군에 불리하다고 생각한 정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한편 청군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분격한 농민군은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다시 봉기한다. 2차 동학농민운동은 강경파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온건파 손병희가 충청도 농민군을 이끌고 합세하며 전라도 중심의 남접과 충청도 중심의 북접이 연합을 이뤘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재봉기 이후 논산에 머물며 공주를 첫 번째 공격목표로 세웠다. 당시 공주에 충청도 감영이 있었고, 전략상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좋은 공주를 확보하는 것이 향후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이었으며, 우금치를 장악하면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전봉준이 '공주를 빼앗지 못한 것이 통한의 한이다'라고 말했을까.

우금치 주변 산꼭대기를 모두 점령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밤이면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관군을 위협하고, 일반인들은 정부군을 도와주는 척 하며 대포에 물을 붓는 등 동학농민군을 편들었다. 하지만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쇠스랑, 괭이, 죽창 등 열악한 무기 때문에 조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이곳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패했다.

최병옥님은 1차 점검에 2000여명, 2차 점검에 1000여명만 남아 전북 순창으로 후퇴했다가 밀고자에 의해 체포된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며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났다며 안타까워했다.

이곳 사람들은 야트막한 우금치(牛禁峙)의 이름을 눈이 오면 빙판이 져 소가 접근할 수 없는 고개로 풀이한다. 우금치라는 이름이 소와 농민을 동일시하던 농경사회로서는 이곳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떻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임으로서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거나 출병할 때는 서로 통고한다'는 천진조약을 위반해 외세의 개입이 커지는 청일전쟁의 빌미를 만들어줬다.

무용가 공옥진 등이 춤을 추며 혼을 달래줬다는 이곳에 특이하게 생긴 봉화대, 돌탑과 가시철망이 감겨있는 조형물이 있다. 1973년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세우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의 비문을 반대파들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긁어놔 볼썽사납다. 역사는 폭넓게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다. 위령탑 왼편으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고, 언덕위에 최근에 세운 조형물들이 서있다.

송장배미로 가기 위해 우금치에서 서쪽으로 가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웅진로를 달려 박찬호의 모교인 공주고등학교를 지난 후 중동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무령로다. 최병옥님은 이곳이 교동의 하고개로 오른쪽에 공주향교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곳의 지명 하고개도 서울·공주·청주·강릉·전주 등 교동에 향교가 있고,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 하마비가 향교 입구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고개를 넘어서면 무령로와 왕릉로가 만나는 모서리에서 송장배미로 불리는 용못(공주시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을 만난다. 이곳은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였던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밀린 농민군이 무수히 죽은 곳이다. 시체를 다 처리할 수 없어 연못에 넣었다는 장소라 민초들의 한을 담은 조형물에서도 서글픔이 묻어난다. 연못 앞에 박세리의 모교인 금성여자고등학교가 있다.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송산리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은 송장배미에서 가깝다. 이곳은 사적 제13호로 지정받을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백제의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송산리는 은진 송씨들이 살던 마을의 지명이다.

웅진이 백제의 도읍지가 되는 과정과 웅진에서 나라를 다스린 왕, 송산리고분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공주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요약해본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에 의해 475년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을 쳐들어오자 위기를 느낀 개로왕은 동생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한다. 성이 포위되자 개로왕은 서쪽 문으로 도망가다 고구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구리시의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적의 졸병이 얼굴에 침을 뱉는 수모를 당하고 비참하게 죽는다.

문주왕은 신라의 구원병을 이끌고 위례성으로 가다 나라가 망한 것 알고 475년 불시에 공주에 도읍지를 정한 왕이다. 천연적인 요새 공주에 도읍을 정했지만 2년 만에 사냥을 나가 밖에 머물다가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도적에게 살해당한다.

삼근왕은 문주왕의 아들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병관좌평 해구가 잡고 있던 군국정사를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동성왕은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동쪽인 대전 부근에 성을 많이 쌓았고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중국의 남제 및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부인이 있었지만 신라의 왕족인 비지의 딸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 신진세력을 견제하려다 임천의 성산사 성주가 된 것에 화가 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당해 1달 만에 죽는다.

무령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으로 40에 왕이 된다. 백가가 또 반란을 일으키자 죽여 시체를 백강의 물속에 던지고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켰다.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침은 물 예성강에 있는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습격을 시도하고, 동성왕 때의 장마에 200여 호가 떠내려가던 백마강에 제방을 쌓아 농민들이 잘 살게 하는 등 정치를 잘해 칭송을 받았다.

성왕은 무령왕의 둘째 아들로 지방통치조직과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국가의 기반 잡히자 538년 협소한 웅진에서 광활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며 백제의 꽃을 피웠다. 여유롭고 계획적으로 수도를 바꿨지만 553년 신라를 공격하다 복병에 의해 전사한다.


송산리고분군은 송산(해발 130m)을 주산으로 한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있다. 고분군의 서쪽으로는 곰나루가 있는 금강, 동쪽으로는 공산성이 위치한다. 고분군은 계곡을 중심으로 서쪽의 무령왕릉·5~6호분·29호분, 동북쪽의 1~4호분과 7~9호분으로 구분한다.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뤄졌다. 특히 공주에서 교편을 잡았던 백제유물의 약탈자 카루베 지은에 의해 도굴된 유물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고분에 유물이 없어 무령왕릉과 구조가 비슷한 6호분의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도 아쉽다. 그나마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게 천만다행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지만 무덤의 주인과 축조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지석(誌石)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고분의 문화연구와 백제사연구의 전기를 마련해줬다. 벽돌 4개를 포개고, 그 위에 짧은 변을 높이로 세우는 축조방법을 여러 번 되풀이했는데 벽면 중간에 오목하게 파서 물건을 넣어두는 벽감실을 배치하여 그 속에 등잔을 넣었다.

바닥은 전면널받침이고 밖에 벽돌을 포개어 배수구를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왕널인 왕관(王棺), 서쪽에는 왕비널인 왕비관이 머리를 남쪽으로 향한 채 배치되어 있다. 왕은 523년에 사망하여 525년, 왕비는 526년에 사망하여 529년에 안장된 내용이 매지권에 써있어 왕과 왕비는 사망한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이 능에 안장되었음을 알게 한다. 백제문화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왕과 왕비의 왕관을 비롯하여 금팔찌, 금귀걸이 등 정교한 금세공품과 도자기, 철기 등 총 88종 2600여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1997년 이후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내부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모형관을 돌아보며 왕릉의 내부구조는 물론 부장품에 대해 알아봤다. 모형관에서 최병옥님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덧붙여본다.

송산리고분군에 겉으로 드러난 고분이 7기지만 실제 16기 이상 있다며 주차장에서 고분군 입구까지에도 작은 무덤들이 30기 이상 있었고,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벽돌무덤으로 문물이 더 발달했던 백제의 도읍지 부여에 벽돌무덤이 없고 공주에서 만들다 파괴한 2기의 무덤이 발견된 것으로 봐 벽돌무덤은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1300도로 굽던 벽돌에 써있는 중방, 종방, 들방, 곱사, 사사, 일사 등의 글씨가 시간이 지나며 종류가 많아진다. 왕릉의 벽돌을 찍은 연도인 임진년은 512년으로 무령왕(501-523)의 재위기간을 따져볼 때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부터 장례를 준비했음을 알게 한다. 상을 하는 2년간은 냉장시설이 발굴된 정지산유적지(사적 474호)에 시신을 보관하였다고 추측하는데 나중에 뼈만 추려서 모셨기에 관이 작다. 무령왕릉의 관은 단단하고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금송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금송이 없던 시절이라 600년생이 넘는 두꺼운 금송을 일본에서 가져왔다. 무덤에서 나온 지석이 600년 뒤에 만든 삼국사기의 잘못을 바로잡은 사실도 중요하다.


이름이 사마였던 무령왕은 삼국사기에 키가 8척이나 될 만큼 크고, 눈썹과 눈이 똑같으며, 마음씨가 인자하고, 정치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왕으로 국가를 편안하게 잘 만들어 시호를 무령이라 붙였다. 또한 첫째 아들 사아는 일찍 죽고, 둘째는 성왕으로 나라를 꽃피우고, 셋째 순타태자의 후손은 일본천황과 관계가 있고, 넷째 공주는 일본 천황과 결혼한 무령왕의 가계도가 중요하다. 


최병옥님은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2001년 방송에서 '나 자신은 간무천황(나라에서 교토로 도읍을 옮김)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고를 느낀다'고 고백했던 이야기와 천황의 부탁으로 집안 아저씨가 무령왕릉을 찾아와 제사지내고 갔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며 무령왕릉의 중요성과 일본에 백제의 성씨를 쓰는 사람이 많음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송산리고분군에서 가까운 거리에 백제의 수도를 지키던 공산성(사적 12호)이 있다. 공산성은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이름도 백제시대는 웅진성, 고려시대는 공주산성·공산성, 조선시대는 쌍수산성으로 바꼈다.


최병옥님의 해설과 공주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로 공산성의 문화재, 백제의 의자왕은 물론 조선의 인조가 공산성과 어떤 사연이 있는지 살펴보자.

이곳 사람들이 산성공원으로 부르는 공산성은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공북루(충남유형문화재 제37호)는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통로길이고, 진남루(문화재자료 제48호)는 남문으로 조선시대 삼남의 관문이었던 주 출입통로다. 쌍수정(문화재자료 제49호)은 인조가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1734년에 세운 정자다. 광복루(문화재자료 제50호)는 군사가 주둔하던 군영의 문으로 광복 이후 광복루라 불렀다. 영은사원통전(충남문화재자료 제51호)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이곳에서 훈련한 승병들이 서산대사의 제자인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청주성을 탈환한 후 패할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의해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영은사의 법당 건물이다. 전투 때의 부상으로 죽은 영규대사는 갑사의 스님들이 화장하지 않고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에 묘를 만들었다.

공주는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자 낙화암의 삼천궁녀로 유명한 의자왕과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만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의자왕은 계백이 황산벌싸움에 패해 나·당 연합군에게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공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소정방에게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병사한다. 광해군의 폭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공신들에게 베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피신한 곳도 공주다. 평소 간식까지 다섯 끼를 먹던 임금이 피난 기간 얼마나 굶주렸으면 임씨네 집에서 진상한 떡이 쫄깃쫄깃하고 맛있어 '아 그 떡 절미로다'라며 떡의 이름을 물어보자 신하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때 '임씨네 집에서 만든 음식이니 임절미라고 하자'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인절미 700미터를 만들어 백제 역사 700년을 기념하는 축제기간에 나누어 먹는다. 인조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경상, 전라, 충청도 사람들이 얼마나 잘 도와줬으면 5명인 과거 급제자에 공주사람 없자 한 명 더 뽑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단다.

공주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비참하게 패해 1602년 충주에서 충청감영이 이전한 후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질 때까지 330여년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이라 공산성에 가면 입구에서 길게 늘어선 공덕비가 맞이한다. 거북 받침과 용두가 있는 공주목사 김효석선정비(충남문화재자료 제71호), 홍수로 붕괴된 제민천교를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제민천교영세비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비석 옆에 최근에 세운 비석들이 서있다. 지금의 도지사인 관찰사는 임기가 1~2년에 불과했는데 말 그대로 관리들을 관찰해 고과점수를 주는 역할을 했다. 


인조가 한양쪽을 바라보며 반란군 진압소식을 기다리던 장소에 세워진 쌍수정 아래 잔디로 덮어놓은 왕궁 추정지가 있다. 최병옥님은 발굴하던 모습과 공산성이나 부여에서만 나오는 수키와, 암키와, 수막새, 암막새와 바람개비문양(파문)을 보여주며 막새가 예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바로 앞 암석이 박힌 깊은 웅덩이는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1미터 밖을 진흙으로 다진 원형그대로인데 연못이나 연꽃재배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은사 아래로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시구문이라고도 하는 수구문이 있다. 이곳을 통과하면 시인묵객들이 시를 읊으며 더위를 피하던 만하루와 연못인 공산성연지를 만난다. 연지는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고, 수면에 접근할 수 있는 계단이 동서쪽에 있으며, 금강쪽에 수로가 있어 강물이 불면 물이 늘어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북문인 공북루는 금강에서 성으로 들어오는 문 위에 세운 누각으로 금강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한다. 지금은 강물이 가로막고 있지만 예전에는 수문병이 지키던 문루를 나서면 금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루가 있었고, 후대에는 각종 다리가 건설돼 공북루는 서울과 호남을 연결하던 내륙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최병옥님에게 천안에서 공주로 계획된 기찻길을 양반들이 지네인 기차가 닭인 계룡산을 뚫고 지나가면 큰일난다며 대전으로 바꿔 발전을 막은 것과 우리나라 3대 부자였던 김갑순이 지금의 민자고속도로와 같이 공북루 앞에 배다리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돈 받은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번 들렸던 곳이지만 '역사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는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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