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타고 청주읍성으로

2010.03.21 23:31:00

청주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성안길은 늘 유행을 좇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에 역사가 깊은 읍성이 있었고, 성의 안쪽 길을 뜻하는 '성안길'이 읍성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큰 길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둘레 1640m, 높이 4m에 달했던 청주읍성의 성곽이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려 성안에 있던 관아와 충청병영의 시설들을 찾아보기 어렵고, 4개의 문터마저 표석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새로운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내 고장에 관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맑은 햇살 아래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봄날, 시내를 걸으며 청주읍성에 관한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지난 3월 7일은 청주삼백리 회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청주읍성을 공부하는 날이었다. 청주의 찬란했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내의 중심가를 걸으며 발전해가는 고장의 문화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다. 시청광장에 모인 회원들은 1922년도의 건설계획도를 보며 일제가 청주읍성을 철거하는 과정과 그 당시 청주지역이 처한 상황을 듣고 답사를 시작했다.


시청 옆 북삼치안센터 앞으로 갔다. 1960년대 말 우암동 문화방송자리로 이전했다가 1970년대 말 지금의 정봉동에 자리를 잡은 청주역이 1921년 처음 세워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아담했던 옛 청주역사와 청주공고 옆으로 시내를 관통하던 철길을 떠올리노라니 무임승차가 자랑거리이던 중학교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현대적으로 개보수작업을 했지만 역이 있던 곳이라 주변에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이 많다.


새롭게 쓰이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 한둘은 지켜보는 게 역사다. 문화거리·휴식공간·어울림마당 등 차 없는 거리로 조성된 중앙로를 걸으며 청주극장·현대극장·자유극장과 함께 영상문화를 전하다 사라진 중앙극장, 역이 생기며 시내의 중앙에 조성된 중앙시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길거리에 세운 '목련과 돼지' 조형물을 만난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강태재 대표는 머리 큰 사람들이 애용하던 모자점, 국화빵집, 국일여관 등이 있던 자리를 지목하며 그 당시의 경험들을 전해줬다. B&M 클럽 앞에서 서문철교가 있었던 무심천 방향을 바라보며 옛 철길자리를 살펴봤다. 이 길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힘차게 달려가던 모습도 아련한 추억이다.


청주읍성에는 청주목사가 집무하던 청주목, 충청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충청병영, 망선루, 객사 등이 밀집해 있었는데 청주목은 청원군청 주변, 충청병영은 중앙공원 일대에 자리했다.

옷에서 봄기운이 느껴지는 젊은이들과 성안길을 걸어 CGV 북문 앞으로 가면 목사가 휴식을 취하거나 시를 짓던 망선루터를 알리는 조형물을 만난다. 이곳이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지금은 중앙공원에 있는 망선루가 처음 자리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취경루를 조선시대 한명회가 망선루로 편액을 고쳤다. 일제가 경찰들의 무술연마 장소인 무덕전을 지으며 헐어 없애려는 것을 청년지도자 김태희 등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과 시민들이 모금을 해 1923년 제일교회 구내로 옮겼다가 나기정 청주시장 때 다시 중앙공원으로 이전 복원했다. 바로 옆 CGV 서문 주차장이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객사터다. 땅속에 자취들이 남아있지만 개인소유라 복원공사를 하지 못한 채 훗날을 기약하며 모래를 깔고 그 위에 포장을 했다는 게 안타깝다.

읍성터 밖으로 상당로와 사직로, 청주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서문대교로 이어지는 읍성 안길이 청주에서 가장 넓은 대로였다. 좁게만 느껴지는 이 길로 버스가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관아의 중심건물로 수령인 목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청주동헌은 CGV 바로 옆에 위치한 청원군청 뒤편에 숨어있다. 군청의 시멘트벽면이 동헌의 처마와 닿을 듯 지어져있어 볼썽사납다. 이곳에서 청주 문화의집 임병무 관장은 청주동헌의 현판 청녕각이 충청병마절도사영문에 걸려있던 사연과 처마 끝의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대어 달아낸 겹처마,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뤄 기와지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팔작지붕, 기둥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집, 정면과 측면의 칸수를 곱해 몇 칸 집이라고 부르는 한옥의 구조를 설명해줬다. 서문터(청추문지) 표석은 군청 서쪽의 서문동오거리로 가면 만난다.






서문터와 가까운 중앙공원에 청주읍성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많다. CGV 앞에서 제일교회로 옮긴 후 청남초등학교와 세광고등학교의 교사 및 집회장소로 활용되다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망선루가 공원의 북문 옆에 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길을 떠났다가 궁궐로 돌아가던 고려의 공민왕이 청주에 머문 것을 기념해 과거시험을 치루고 합격자의 방을 망선루에 붙였는데 그때 장원급제한 사람이 훗날 조선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 삼봉 정도전이다.

오늘 날 지방자치의 시작이 향약이고, 율곡 이이가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정한 서원향약이 퇴계 이황의 예안향악과 함께 향약을 대표한다. '착한 일이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악한 일이란 효도하지 않고 자애롭지 못한 것, 우애가 없고 공손하지 않은 것, 스승을 공경하지 않는 것, 부부간에 분별이 없는 것, 아내를 구박하는 것...' 망선루 앞 큰 돌에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서원향약 도덕요목이 써있다. 44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도덕요목이 인간의 근본도리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의병과 승병이 왜군이 점령한 성을 탈환하며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보를 전한 역사의 현장이 청주읍성이다. 동문 옆으로 읍성 탈환에 공을 세운 화천당 박춘무선생, 중봉 조헌선생, 기허당 영규대사의 전장기적비가 서있다. 1651년 해미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충청도병영의 출입문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은 남문 옆에서 수령 900여년, 높이 30여m의 은행나무 압각수를 바라보고 있다.

강태재 대표는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국방정책이 육지의 중요 교통로를 지키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어 충청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졌고, 충주에 있던 도청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남쪽 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청녕각을 서쪽에 걸었으나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출입했었다. 읍성 안에 행정관청인 목과 군대인 병영이 있는 곳은 청주읍성이 유일하고, 청주는 적을 방어하는 관방시설이 많은 지역으로 청주상당산성·부모산성·정북동토성·청주읍성·우암산 토성(나성)·것대산봉수대·율봉역 등을 복원하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공원당 앞 골목길을 지나 국보41호 용두사지철당간으로 갔다. 이곳에 용두사라는 절이 있었고, 절의 행사를 알리기 위해 깃발을 달아두는 당간의 철통표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참여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호족중심의 지방자치를 실현하던 통일신라시대에 서원소경을 관장하기 위해 경주에서 보낸 경주 김씨와 청주의 토호세력이었던 손씨, 경씨, 한씨들이 건립추진위원회와 같은 모임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20칸만 해도 이렇게 높은데 원래는 원통이 30개였다니 높은 건물이 없던 그 당시 철당간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짐작이 간다.

옛날 홍수피해가 많아지자 돛대를 세우라는 점술가의 말대로 당간을 세워 배의 형상을 만든 후 재난이 없어져 청주가 주성(舟城)이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철당간에서 상당로 방향으로 나가면 롯데영플라자 옆에 동문터(벽인문지) 표석이 있다. 길 건너편 충북도청 터는 잉어배미라 불리던 논자리다. 청주읍성의 남문터(청남문지) 표석은 국민은행 남부지점 앞에 있다. 청남문은 성곽도시였던 청주읍성의 관문으로 출입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옹성이 있던 자리가 빈 공간으로 남아있어 옛 읍성의 윤곽을 알게 한다.

4개의 문을 다 돌아보면 읍성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시내의 중심가인 '서문동, 남문로, 북문로'라는 지명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된다. 읍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청주는 아름다운 역사의 도시로 인정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도 크다.

청주읍성이 헐린 자리에 도심이 활성화되어 지금의 화려한 번화가를 유지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상권이 읍성 밖에 형성되어 있었다. 땔감, 쌀, 한약재, 소, 고기 등 거래하는 물품에 따라 나무전, 싸전, 약전, 쇠전, 피전골목으로 나뉘며 저자거리를 형성했다.

남쪽 끝에 재래시장을 대표하는 육거리시장이 있다. 조선시대 이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인 남석교는 무심천의 물길이 외곽으로 변하여 교량역할을 할 수 없고, 주변의 하상지역이 매립되어 시장으로 변하면서 육거리시장의 땅속에 묻혔다.

남석교 네 귀퉁이의 석조견상 법수를 1930년대 초 다리를 매몰하며 2개는 충북도지사 관사, 2개는 동공원에 보관했다는데 현재 충북대 박물관에 1개,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2개가 남아있을 뿐 1개는 사라졌다.

강태재 대표는 정조가 전국의 읍성을 조사한 후 수원에 화성을 조성한 것으로 봐 화성 화홍문 앞의 해태상 법수도 이곳에서 배워갔을 가능성이 있다며, 남석교를 들어내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고 다리 밑에 호수를 만들어 모양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법수를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외국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답교놀이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04년 밀러(민노아)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고 70여 년 망선루를 보호 관리하던 제일교회는 육거리시장 옆에 있다. 시장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삶의 활력소가 된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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