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무 껍질 같은 손
1972년 12월5일, 나는 발령이 나서 이 학교에 부임을 하였다.
사실 6학년 담임을 하여서 이미 입학원서도 다 썼고, 졸업사진까지 다 찍어 놓은 상태에서 근무하던 학교를 떠나려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교감선생님과의 다툼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교감선생님의 깔쭉거림에 지친 내가 차라리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우리 교감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감선생님은 바로 우리 고장에서 나고 자란 분으로 형님과는 친구 사이이고 학교도 바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나의 모교 선배님이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 가지 않고 젊은 시절을 몽땅 이 학교에만 있으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집안일에 열성을 부리므로 해서 고장 사람들에게서 [논두렁선생]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분이셨다. 나와 같이 근무하면서도 내가 6학년 담임을 하면서 밤에도 아이들과 학교 교실에서 합숙을 하고 있을 무렵에도, 아침에 학교에 오면 아이들 앞에 있는 책상에서 신문을 펼쳐들고 앉아서 무엇을 하는지 한두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에게는 칠판에 글씨를 써두고 베끼게 하거나 자습을 하게 시켜 놓은 채 두 시간쯤이 지나고 끝 종이 나도 아이들이 나오지도 않고 시끄러워서 교실을 들여다보면 신문에 얼굴을 쳐 박고 자고 있는 것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이런 교감이 자기가 했던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제 교감이 되었다고 다른 교감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직원들을 들볶아대는 것이었다. 더구나 날 더러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시험대를 걷어서 남으면 술도 한 잔 사고 그러지 않는다고 숫제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장에서 나고 자란 자기는 6학년 담임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생을 하는지 시험지 대금이 안 걷히는 지조차 모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읍내 학교로 간 선배님이 부르는 대로 읍내 학교로 갈 생각을 했던 것이었고, 선배님은 나를 불러서
“자네 교감선생하고 싸웠다면서? 잘 했어. 그런 사람을 그렇게 해대 놔야 정신을 차리는 거야. 올챙이적 생각은 못하고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 앞에서 그게 무슨 꼴이야. 자네 우리 학교로 올 생각은 없나?”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사실 오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하였다.
“사실 저도 이제는 그 학교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고향학교이고 후배들이라고 8년이 다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 봤자, 한 고향에서 자란 교감이란 사람이 더 못 봐서 안달인 그런 학교에 남아 있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나의 이야기를 듣자 선배님은
“내가 그럴 줄 알고 교장선생님께 미리 말씀을 드려 두었네. 자네가 희망만 하면 당장이라도 올 수 있을 것이네. 지금 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올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이니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좋습니다. 오게 해 주십시오.”
했더니,
“그래? 그럼 당장 교장 선생님을 뵙고 가게.”
하여서 함께 교장선생님꼐 가서 인사드리고 선배님은 나에 대해서 간단히 그러나 가장 강점만을 들어서 소개를 해주셨다. 교장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자네가 정말 오고 싶단 말이지? 자네 꽃을 좀 가꿀 줄 아는가?”
하고 물으셨다. 선배님이
“이 사람 꽃이라면 어느 누구보다 잘 가꾸지요. 지금도 수십 종의 꽃을 집에서 가꾸고 있으면서 꽃모종을 모두 학교에 가져다 심었으니까요.”
하자 교장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좋아 그럼 우리 학교로 오는 거네. 내가 교육장님께 말씀드려서 당장 발령 내라고 하네.”
하시는 것을 나는
“감사합니다. 불러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알겠다고 가서 있으면 금방 발령이 날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나는 이미 발령장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출발을 하였다.
새로 부임한 나에게 맡겨진 것은 4학년이었다. 학교가 좁아서 교실을 더 지으면서 학교 앞을 지나는 길을 건너서 언덕 아래 공터에다가 8개 교실을 지어 놓았는데, 바로 그곳에 있는 교실이었다.
이 교실은 별명이 여럿 있는 이 학교의 명물 중의 하나이다. 아니 이 학교에서 골칫덩이 중의 하나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우선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 [제주도]이다.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이곳은 [시베리아]가 된다. 얼마나 추운지 교실 안에서도 고드름이 얼 정도이다. 그것은 이 학교의 위치가 골짜기의 입구에 위치하여 학교 운동장과 길 건너의 학교교실에 골짜기의 주둥이 부분이 되기 때문에 골짜기 바람이 온통 이곳으로 스쳐 지나기 때문에 바람이 부는 날은 아무리 눈이 내려도 눈이 쌓이는 법이 없는 곳이 바로 이 교실이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여름이 되면 이곳은 또한 바람이 지나도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전혀 없는 [찜통]이 된다. 교실선 것과 같은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교실 안에는 전혀 소식도 없으면서 나뭇가지만 흔들고 지나는 것이다. 거기다가 학교 숙직실에서 멀리 적어도 150m는 떨어진 교문 밖에 있는 교실이어서 여름 한철은 이 교실들은 [무료 여관]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 붙는다. 7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남녀가 만나도 몰래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대이기도 하였지만, 요즘처럼 호텔이나 여관, 모텔이 있는 그런 때도 아니었다. 읍내에서 연애를 하는 남녀가 돈도 없고 갈 곳이 없으면 이곳의 교실을 찾아 와서 자고 가는 흔적을 남겨서 골치를 앓는 그런 교실이었다.
이런 교실에서 63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맡은 나에게 선생님들은 이 학급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담임이 몸이 아파서 도저히 근무를 할 수가 없어서 거의 일년 내내 그냥 내팽개치다시피 하였던 반으로 아무도 맡을 사람이 없는 사고뭉치들만이 모여 있는 반이란다. 일단 교실에 들어서서 나의 소개를 하고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였더니 1/3 정도는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둘째 시간에 아이들의 용의를 좀 살펴보았더니 이런 일도 있는 것인가? 전쟁을 겪는 전쟁터도 아니고 집이 없는 거지들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것은 63명중에서 손이 트지 않고 깨끗한 아이가 단 4명이었고 59명이 손이 터서 피가 흘러나올 만큼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인 아이들을 기어이 발까지 벗겨 보았더니 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에게 무엇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나는 우선 깨끗하게 몸단장을 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지금 여러분의 손과 발을 조사하였더니 60명이 손이나 발, 또는 양쪽이 모두 터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공부를 하러 온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보다도 여러분의 위생상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냥 두면 겨울이 깊어 가면 모두 동상이 걸려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잘라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상이 심하면 자르는 것은 잘 알지요.”
하였더니 그것은 알겠다고 했다. 그럼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서 내일 당장 다시 조사를 할 테니까 손에 때를 몽땅 벗겨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튼 곳은 엄마의 화장품이라도 좀 발라주세요. 더 이상 터지지 않게 해야 하니까. 알겠지? 만약 안 벗겨 가지고 온 사람은 그냥 안 벗겨지도록 잉크를 발라 줄 거야. 선생님은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해 !“
하고 엄포를 놓았더니 다음날 세 사람이 안 씻어 와서 정말 잉크를 발라 가지고 다음 날은 꼭 벗겨 가지고 나오라고 했더니, 사흘째에는 모두 하얀 손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만난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잘 가르쳐 볼까 걱정이 앞섰었다. 그런데 이렇게 엉망이었던 이 아이들을 나는 4학년 12월 5일에 담임을 하여서 한 사람도 바꾸지 않고 그냥 그대로 6학년 졸업까지 시켰다. 실제로 담임을 한 시간이 2년 3개월이나 된 셈이다. 5학년 올라갈 때에도 교장 선생님이
“그 반은 맡을 사람이 없는 반이네. 자네가 맡아서 가르쳐 주게. 이제 겨우 틀이 잡히고 안정이 되어 가는데 다시 맡으면 쉽게 고쳐 놓을 수 있을 것이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부탁을 들어서 그냥 5학년의 담임이 되었고, 6학년이 되어서도 그냥 데리고 갈 수 없겠느냐는 말씀에 그냥 맡되 한 가지 조건만 들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것은 가장 말썽꾸러기를 고치기 위해서 반장을 한번 시켜야 하겠는데, 그걸 허락하시면 맡겠노라고 한 것이었다. 가장 말썽꾸러기, 5학년짜리가 어머니의 생선 행상 하시는 밑천까지 몽땅 가지고 나가서 모두 다 쓰도록 까지 학교는 물론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 담배, 도박까지 한다는 아이였다.
이 아이가 5학년말쯤에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담임을 따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아주 확실하게 고쳐 놓으려면 반장을 맡겨서 책임을 주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아야겠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렇게 하라고 승낙을 해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6학년 1학기를 이 아이에게 반장을 맡기고 저녁이면 집에 와서 과외공부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가난한 그 아이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졸업을 시키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효행소년이 되어서
“우리 아들이 날마다 집에 오면 물 길러다가 청소 다 해놓고, 저녁 지어 놓고 내가 들어가면, 어머니 힘드시지요. 하면서 어깨 주물러 주고 다리 주물러 주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효자가 되었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사람 만들어 주셨는데 이렇게 찾아뵙지도 못하고 사람 노릇을 못합니다.”
하면서 어머니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통에 역 대합실에서 몸둘바를 모르고 난처해하기도 하였던 아이였다. 어쨌든 이렇게 부모님을 잘 모신다는 어머니의 감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에 한 시름을 놓을 수 있는 고마운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언젠가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