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의 아름다움

2011.03.28 09:06:00

나는 곧잘 화성의 성곽을 따라 걷는다. 화성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마음이 열린다. 눈부셔 못 견디는 아름다운 역사의 달무리가 펼쳐진다.

화성은 수원 도심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앉아 있다. 성벽은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그 잿빛은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한다. 보통 성은 직선이어서 고압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화성은 평지에도 구불구불하게 쌓아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화성은 국왕의 꿈이 실현되지 못한 아픔이 서려 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의 상처를 안고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정조는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다. 화성 건설은 그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꿈꾸던 화성은 불행히도 애초의 뜻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 성내에는 이 도시를 성대하게 키우고자 했던 정조의 사당만이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참하고 슬펐던 역사는 이제 따뜻한 세월에 화려한 고적으로 남았다. 성곽은 화선지에 붓 자락으로 슬픈 숨결을 척척 그어 놓은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성곽은 역사의 아픔을 위안 삼아 온유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화성은 햇살조차 눈부시게 슬프다.

성곽에 앉아있으면 그리움이 채워진다. 살다보면 마음속에 그리움이 자란다. 그리움은 아픔이 되기도 한다. 어느덧 돌아보면 나는 거짓말처럼 혼자다. 그때마다 성곽에 오르면 멀리 있는 광교산 연봉들이 선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저마다 숲속 허리춤에 감추고 있는 바람까지도 보내오며 그리움을 달래준다.

해질녘이면 성곽은 노을을 배경으로 깊은 명상 속에 잠겨버린다. 과거의 시간은 쇠약해지거나 소멸돼 온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진보하고 발전해 오는구나. 노을은 저 하늘가에서 서성거리며 독백을 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간직한 품이 넉넉하다.

여름밤에 서장대에 오른 적이 있는가. 달빛이 비추는 한적한 밤길을 따라 팔달산 정상까지 오르면 가슴까지 맑아온다. 서장대는 정적이 깨질까 봐 달빛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 소나무도 마치 명상을 하는 수도승처럼 움직임이 없다.

화성의 아름다움은 계절에 따라 변한다. 봄이 되면 성곽은 발꿈치에 진달래를 키운다. 여름은 온통 푸른 잔치에 지쳐있다. 방화수류정의 늘어진 버드나무는 우리의 마음처럼 부드럽다. 가을에 펼쳐지는 단풍은 성곽을 더욱 고즈넉하게 한다. 겨울은 또 어떤가. 성곽은 눈으로 덮여 침묵하는 소리만 들린다.



화성은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다. 생명이다. 생명 탄생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봄, 여름이 생명 탄생의 감동을 주는가 하면 가을은 이별의 쓸쓸함을 전한다. 겨울에도 눈보라와 혹한이 몰아치지만 나무들은 인내하고 감내하면서 봄을 기다린다. 그래서 화성의 자연은 영원히 이어지는 조화로운 생명이 숨 쉰다.

수원 성곽은 백성을 사랑했던 군주의 마음이다. 성곽은 생김새도 아래로 백성을 안고 있다. 그 모습은 넉넉함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1795년 을묘년에 정조대왕이 행차 했을 때 이곳에서 친히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펼쳤다고 하니 그 모습에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마음이 우리를 화성에 머물게 한다. 정조의 효심과 함께 대대손손 민족의 마음을 밝혀준다. 그래서 화성은 지금도 서민의 안식처다. 휴일이면 가족끼리 연인끼리 성곽을 따라 걷는다.

화성은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수원성으로 바뀌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포탄에 할퀴고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묵직한 역사의 무게도 참고 견뎌온 성곽이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는 이런 화성을 내려오면서 사는 법을 배운다. 성곽이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늠름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어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나 세월이 그렇게 평탄만 하겠는가. 가난과 고통, 절망과 슬픔 등 삶의 순간순간마다 밀어닥치는 불행에 비틀거리기 보다는 헤쳐 나가는 삶의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몸과 마음의 무게를 걷어내고 싶을 때 화성을 걷는다. 화성은 자신의 둥치를 애써 꾸미려 하지 않고, 거무스레한 등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비바람을 잘 견디고 역사의 부침에도 듬직하게 살아왔다. 그곳에 기대어 보면, 침묵으로 영원에 닿아 있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 숨결은 온갖 세월의 아픔을 삭여서 사는 우리 겨레의 모습을 닮았다. 화성을 내려오면서 마음속에 돌을 하나씩 쌓아본다. 어려움을 삭여서 평온을 얻는 것처럼 나도 마음속에 장엄하면서도 부드러운 평화를 쌓아 본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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