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신문을 본다.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서 세상을 읽듯 나도 신문을 통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정리한다. 그것이 소소한 일상이든 정치적 이슈이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주변이다. 신문 하나로 세상을 본다는 논리는 어쩌면 지극히 초라한 변명 같다. 하지만 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나는 신문이 전부다.
신문은 자유로움을 준다.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순간은 신문 보는 시간이다. 영상 미디어는 나를 구속하지만 신문은 펼치는 순간 여유가 생긴다. 신문을 보는 순간 다른 매체에서 느끼지 못하는 소박함이 밀려온다.
지난 3월도 나는 신문을 쥐고 세상을 읽었다. 국내는 동남권 신공항 문제, 국제적으로는 중동 사태에 이어 리비아 문제, 일본 쓰나미, 그리고 원전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등 쉴 사이 없이 일이 일어났다.
내가 신문을 즐겨보는 이유는 사건 사고 소식을 신속정확하게 보도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간혹 신문에 따라 논점이 다르고 정치적 시각이 다르기도 하지만, 진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본래 기능을 신뢰한다. 그리고 신문은 좋은 글과 올바른 표현으로 독자를 만난다는 정신도 좋아한다.
그런데 최근 신문(중앙일보)을 보면서 안타까운 면을 발견했다. 표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었다. 가장 먼저 3월 29일자 기사다.
○ 천안 병천 순대촌, 아직도 구제역 몸살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삼거리. 50여 년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병천 순대타운이 있는 이곳에는 순대국밥집 29곳이 영업 중이다. 28일 낮 12시 순대타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원조 병천 토종 순대집’. 60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정도의 좌석에는 겨우 10여 명만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밑줄 그은 표현은 맞춤법이 틀렸다. 순 우리말로 된 합성어에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는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다(한글 맞춤법 제30항). 따라서 ‘순댓국’이 바른 표기다. ‘뭇국, 감잣국, 배춧국, 시금칫국, 선짓국’도 모두 마찬가지다.
3월 30일자 기사도 섬세하지 못한 표현이 있다.
○ 과학으로 본 교통체증 원인
맨 앞에 달리던 대형 트럭이 갑자기 차선을 바꾸면 뒤차들은 줄줄이 속도를 줄이게 된다. <중략> 하기야 운전자들이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도 다행이다. 사람들은 통상 도로 ㎞당 차가 20대 이상이 되면, 자기 차선보다 옆 차선이 덜 막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1999년 캐나다 토론토대, 미국 스탠퍼드대 공동연구). 두 차선의 평균 속력이 같더라도 심리적인 이유로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 ‘차선’은 ‘차로’로 바꿔야 한다. 국어사전에 ‘차선’은 ‘자동차 도로에 주행 방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 놓은 선’이고, ‘차로’(이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찻길’로 순화하여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는 ‘사람이 다니는 길 따위와 구분하여 자동차만 다니게 한 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차가 달리는 길이 ‘차로’이고, 차로와 차로를 구분하느라 그은 선이 바로 ‘차선’이다. 따라서 신문 기사의 ‘차선’은 모두 잘못이다.
3월 31일자 신문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왜곡하고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내용의 일본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가 충격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왜곡의 정도가 예전보다 심해졌다. 지난 2008년 일본 정부의 영토 교육 강화 지시를 반영해 일본 중학생들이 배우게 될 중학교 지리와 역사, 공민 교과서가 새로 만들어졌다. 교과서에는 18종의 사회과 교과서 가운데 12종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신문에서는 특집을 다루고 있는데, 중앙일보는 한 단계 더 나가서 ‘위안부 문제는 어디에도 안 실려’ 있다며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진실을 호도하려고 만들어낸 표현이다. 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주로 전쟁 때 군대에서 남자들을 성적(性的)으로 위안하기 위하여 동원된 여자’라며 ‘위안하기’라는 민망한 해석을 하고 있다. 제국주의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가 평생을 망친 피해자들에게 ‘위안’하러 갔다는 것은 가슴에 또 한 번 피멍이 들게 한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성노예’라고 쓰자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이 주장이 합당하고 또 그렇게 가는 것이 올바른 역사적 표현이다.
인터넷 등 미디어의 발달로 신문 독자가 준다는 조사가 자주 발표된다. 심지어 21세기에는 인쇄 신문은 심심풀이 광고지일 뿐이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 신문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 검토돼야 한다. 바른 표기에 앞장서는 것도 그 하나가 될 수 있다.